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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디지털 성범죄 단죄, 피해자 중심의 형법 필요”…전문가 대응 국제협력 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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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 의도 증명, 처벌 어렵게 해”

딥페이크 등 신종 범죄 포함 강조

호주, 동의 없는 유포 징역 5년까지

48시간 내 삭제 어기면 ‘벌금폭탄’

영국인 여성 ‘안나’는 성적인 영상을 찍어 남자친구에게 보낸 적이 있다. 남자친구는 이별할 때 영상을 지웠다고 했다. 거짓말이었다. 영상은 인터넷 불법영상 사이트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유포됐다. 안나의 가족과 친구도 영상을 봤다. 경찰은 영상 게시자를 찾아내기 어렵다고 했다. 안나는 영상을 삭제하려고 했지만 영상은 인터넷에서 계속 공유되며 확산됐다. 다른 사람으로 보이려고 머리를 염색하고 일부러 몸무게를 늘렸다. 우울증에 시달리던 안나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도 했다. 안나는 “내 모든 세상이 파괴됐다. 멈추지도 않고 끝도 없는 고통”이라고 했다.

‘디지털 성범죄 체계적 피해지원 방안 및 국제협력’을 주제로 열린 국제회의에서 나온 사례다. 이날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열린 국제회의에 여러 국가의 디지털 성범죄 전문가들이 모여 대응 방법을 논의했다. 이들은 성범죄를 처벌할 때 가해자의 동기가 아닌 피해자의 동의 여부에 중점을 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클레어 맥글린 영국 더럼대 법과대학 교수는 안나를 상담했다. 그가 강조한 건 ‘피해자 중심의 형법’이다. 맥글린 교수는 “가해자의 성적 의도를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형법은 성범죄에 대한 처벌을 까다롭게 만든다”며 “피해자 목소리를 듣는 것이 중요하다. 불법촬영 영상 유포는 성적 만족감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상대를 지배하는 권력감을 느끼고 싶어 유포하기도 한다. 디지털 성범죄에는 여러 동기가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기술 발전으로 신종 디지털 성범죄가 등장한다. ‘딥페이크’ 기술로 피해자 얼굴 사진을 음란물에 입혀 조작하기도 한다. 조작된 음란물 제작·유포를 처벌하는 법이 따로 없어 정보통신망법상 명예훼손 혐의 등을 적용하지만 대부분 가벼운 처벌을 받는다. 맥글린 교수는 “딥페이크 기술을 이용해 평범한 일상 사진을 음란물로 조작하는 것이 쉬워졌다”며 “신종 디지털 성범죄를 포함하는 형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영국 피해지원단체 ‘헬프라인’의 소피 몰티머 팀장도 디지털 성범죄 처벌 요건에서 ‘피해자에게 고통을 줄 의도’를 삭제해야 한다고 했다. 피해자의 나체나 성행위 영상뿐 아니라 사적 영상도 유포하면 성범죄로 처벌해야 한다고 했다. 몰티머 팀장은 “가해자의 의도는 입증하기 어렵다. 가해자가 ‘그럴 의도가 없었다’고 부인하기도 쉽다. 의도와 상관없이 피해자는 큰 충격을 받는다”고 말했다.

호주는 디지털 성범죄를 강력하게 처벌한다. 국가기관인 온라인안전국(OESC)에서 신고 접수, 삭제 조치, 피해 지원을 맡는다. 피해자 동의 없이 성적·사적 영상을 공유하면 5년 이하 징역형으로 처벌하는 ‘온라인 안전 강화법’도 지난해 8월 국회를 통과됐다. 영상 삭제 요구가 있으면 48시간 안에 삭제해야 한다. 삭제하지 않으면 기업은 최대 52만5000호주달러(약 4억2000만원), 개인은 최대 10만5000호주달러(약 8400만원)의 벌금을 내야 한다.

허진무 기자 imagine@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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