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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방민호의문학의숨결을따라] ‘쉬는 그림자’ 꿈을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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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송강 등 가사문학 꽃피운 곳 / 새벽 정자의 고요한 풍경 고즈넉

담양은 햇볕을 담아놓은 곳, 광주호 지나서 식영정을 옆에다 두고 조금만 더 가면 가사문학관이 있다. 담양은 가사문학의 산실이다. 송강 정철을 비롯해 가사문학이 꽃피운 곳이 바로 여기다. 올 들어 지난 2월 19일에 ‘가사문학면’ 선포가 있었다. 남면이라는 이름을 가사문학면으로 바꾼 것이다. 이런 식의 지명 변화는 극히 드문 일이다.

가사라는 전통적 시가는 연구자 김학성 선생에 따르면 4음 4보격 연속체의 전통 정형시다. 고려말 나옹 선사의 ‘서왕가’가 첫 모습이었다 하는데 조선 들어와 송순, 정철의 작품들로 찬연한 모습을 드러내고 후기로 오며 규방가사, 동학가사 등으로 민중 깊이 뿌리를 내렸다.

세계일보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처음 가사문학관을 찾아간 것은 몇 년 전이다. 문학관 내부를 돌아보는데 무언가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었다. 일 따라다니면 자연이 보이지 않는 법인데, 한글로 쓴 작품이 그렇게 아름다워 보일 수 없었다. 이번에는 이 가사에 대한 짧은 생각을 발표하기 위함이었지만 담양 부근에 들어서자마자 아름다운 늦가을 산야 풍경이 두 눈에 훅 하고 ‘끼쳐’ 들어온다.

지난번에 와서 보지 못한 이곳 명승을 조금이라도 확인하고 싶어진다. 하지만 아침부터 떠나 오후 두 시가 넘어 이제야 당도, 곧 일이다. 아쉬운 마음 잠시 접고 내일 아침을 기약한다.

일이 끝나고 이야기를 나눈 사람끼리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가사문학관 바로 옆 식당으로 자리를 옮기는데, 이 집 주인은 김치 명인이라고 한다. 식당 주인과 ‘절친’인 최한선 선생이 처음에는 사삼주, 곧 더덕주를, 다음으로 하수오주를, 그것도 모자라 막판에 꾸지뽕주를 ‘강제징발’한다. 그중에는 10년 넘게 담아 놓은 술도 있으니 식당 주인은 꽤나 큰 손실이 났겠다.

이 동네 분들은 한 말씀을 해도 유머러스하다. 부드러운 어조를 술잔 너머로 느끼며 나는 이곳 식영정을 무대로 송강이 썼다는 ‘성산별곡’의 노래 구절을 생각했다. 정 송강은 정치 역정은 굴곡 심하기 이를 데 없고 정적도 많았지만 그의 사미인곡, 속미인곡, 관동별곡에, 이곳 담양 창평 성산을 무대로 네 계절의 사연을 담은 성산별곡은 구절구절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한 사람의 삶도, 자연적인 삶과 사회적인 삶이 있어 어느 면은 잘해도 다른 면은 못하게 마련이니, 나 역시 둘 다 잘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하리라.

자리는 쉬이 파했다. 대구에서 건너와 토론을 해준 박현수 시인의 단잠을 뒤로하고, 아침 일찍 소쇄원 보자하고 길을 떠났다. 하지만 그 절승이라는 소쇄원 탐방은 눈물 머금고 다시 뒤로 미루어야 했다. 요즘 명승지 관리는 이렇게도 엄격한지, 문 열 시간 안 되었다고 절대 못 들어간다 한다. 겨우 입구 앞까지 길 옆 대나무 숲만 보고 아쉽게 돌아선다.

대신 환벽당, 식영정은 지키는 사람이 없다. 새벽 아침의 고요한 정자들, 그 정자에 서서 바라보이는 고요한 풍경 모두가 바로 온전히 내 차지다. 환벽당에 올라 이 ‘환벽’, 벽으로 둘러쳤음이란 앞에 보이는 산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식영정에 들어가니 정 송강 시대에 김성원이라는 이가 장인 임억령을 위해 지었다는 사연이 눈에 들고, ‘쉬는 그림자’라는 정자 이름이 신비로움을 더한다.

일찍이 이 석천 임억령과 함께 서하당 김성원,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을 가리켜 식영정 사선(四仙)이라 했다 하니 이는 필시 신라 효소왕 때 삼일포에 와 놀던 영랑, 남랑, 술랑, 안상의 ‘사선’에 빗댄 말일 것이다.

정자 앞에 서니 부용당과 그 앞 고요한 세상이 눈에 들어온다. ‘장자’에 나온다는 이 ‘쉬는 그림자’의 유래를 생각한다. 나도 이 ‘식영 세계’에 머물고 싶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일을 위해 서울 올라가기 전에 오늘은 무주로 가야 한다. 언젠가 다시 이 식영 세계에 들어 소쇄원을 만끽해 보리라.

방민호 서울대 교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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