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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오태식의 알바트로스] 100타 쳐서 좋은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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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골프를 하다 보면 지독히 운 없는 날이 있다. 그날이 그랬다.

잘 맞은 첫 홀 티샷이 그만 카트도로를 맞고 OB(Out of Bounds) 구역으로 날아간다. 오히려 조금만 덜 맞았다면 페어웨이에서 버디를 노릴 수 있었을 텐데. 아쉬움은 실망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동료들 중 누군가 "첫 홀 올파 어때"라고 제안해 주길 은근히 기대했건만 유일하게 파를 기록한 동료가 "오늘은 스코어 한번 제대로 기록해 보는 게 어때"라며 희망의 싹을 자른다.

트리플 보기를 자극제 삼아 두 번째 홀부터는 제대로 한번 해보자고 마음을 다잡지만 이게 웬걸. 불운의 트리플 보기 악몽을 잊지 못한 골퍼에게선 좀처럼 굿샷이 나오지 않는다.

몇 홀 보기가 이어지더니 파5홀에서 버디를 노릴 기회가 왔다. 세 번째 샷이 핀을 향해 똑바로 날아간다. 핀에 붙을 것 같은 느낌이 왔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다. "아차, 오늘은 운 없는 날이지." 그만 한 뼘 정도 짧아 공은 벙커로 처박힌다. 도저히 언플레이어블 볼을 부르지 않으면 탈출이 불가능한 상황이다. 1벌타를 받고 벙커에서 드롭을 한 뒤 다섯 번째 샷으로 핀에 붙여 보기를 노린다. 누군가 불행은 연속으로 온다고 했던가. 조금만 더 힘을 냈다면 정말 핀에 딱 붙었을 샷인데, 그만 종이 한 장 차이로 벙커 경사 끝을 맞고 공이 하릴없이 골퍼 발 옆으로 다시 굴러 들어온다. 버디를 기대했던 홀에서 치명적인 쿼드러플 보기가 나온다. 이건 절망이다. 이건 최악이다. 아니 이건 참사라는 말 외에는 표현할 방법이 없다. 그래 오늘 한번 어디까지 망가지나 보자. 오기가 생긴다.

'오리 3마리'가 연달아 날아와 스코어카드에 살포시 앉는다. '2 2 2'. 원래 스코어카드에 '더블 보기'를 적을 때 파3에서는 '5', 파4에서는 '6', 파5에서는 '7'을 적는다. 그런데 한국의 한 주말골퍼가 더블 보기는 무조건 '2'를 써도 괜찮은 대발견을 했다고 한다. 골퍼 관점에서 보면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이래, 세계적으로 보면 비아그라 이후 최고의 발견이라고 할 만하다. 아, 그럼 '더블 보기' 대신 '오리'라는 골프 은어가 생긴 것도 다 '그놈' 탓 아닌가. 괜한 적개심이 솟는다. 그날 운 나쁜 골퍼의 스코어는 정확히 100타를 기록했다. 100점도 아니고 100타라니.

하지만 라운드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그 '100타 골퍼' 얼굴엔 미소가 가득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실 벙커에 빠져서 쿼드러플 보기를 한 파5홀에서 하마터면 더블파가 나올 뻔했다. 3m쯤 되는 마지막 퍼팅이 홀을 한 바퀴 돌고 들어간 것이다. 운이 좋아 최악을 피한 것이다.

오리 3마리가 날아온 그 홀들에서도 더 큰 참사가 벌어질 수 있었다. 오리 3마리가 아니라 갈매기 3마리(3 3 3)가 날아올 뻔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날 4명 중 2명이나 파를 한 개도 잡지 못하는 '무파(無 Par) 라운드'를 했다.

최악의 스코어는 모두 그날 코스에 분 지독히 강한 바람 탓이었다. 그날 100타를 친 골퍼는 4명 중 2등을 했다. 툭하면 싱글 스코어를 냈던 최고수 친구가 99타를 쳤고, 다른 두 동료는 무려 107타와 109타를 쳤다. 강풍 앞에 장사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은 사실 100타 쳐서 기분 나쁜 날이 아니라 100타 쳐서 기분 좋은 날이었다.

[오태식 스포츠레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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