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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세대가 아닌 세상이야기] 겉과 속이 다른 제도는 안하는 게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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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국내 A기업의 사장은 회사의 젊고 유연한 조직문화를 위해 자율복장제를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손수 전 직원에게 이를 알리는 메일을 썼고, 조직에 긍정적 변화가 일어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는 제도가 시행된 다음에도 직원들의 복장이 그리 자유롭게 변했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사실 여기에는 모든 직원이 알고 있지만 사장만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바로 그 밑의 부사장이 사장의 메일 다음에 하나의 메일을 덧붙인 것을 말이다. "차월부터 자율복장제 시행. 단 바지는 회색·남색·검은색만 입고 다닐 것."

또 다른 B기업은 기업문화 혁신을 위해 기존의 과장님, 부장님과 같은 호칭을 대신해 모든 직원이 평등하게 ○○님으로 이름을 부르는 호칭 파괴를 시도했다. 김 대리는 처음에 부장님을 ○○님으로 부르는 것이 어색했지만 이내 익숙해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회의에서 기계처럼 부장님이 하는 말을 받아 적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호칭을 파괴했지만 회사의 위계질서는 여전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에는 친한 후배 사원이 본인을 '○○님'이 아닌 '형님'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형님과 누님도 님'이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말이다.

최근 자율복장제와 호칭 파괴, 그리고 유연근무제 등이 기업문화 혁신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기업으로 퍼지고 있다.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실제 사례를 봤을 때, 제도의 변화가 실제 기업문화의 개선으로 이어지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소위 잘나가는 구글과 페이스북 같은 글로벌 정보기술(IT) 기업의 사례를 벤치마킹해 야심 차게 준비한 제도인데 왜 생각대로 실행이 안 되는 걸까?

기업의 알맹이는 그대로인데 겉에 보이는 껍데기만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율복장제를 도입한 A기업은 사장 본인의 '선한 의지'가 있다 하더라도 이를 실행하는 기타 경영진과 관리자가 이를 왜곡시킨 경우이고, 호칭을 파괴한 B기업은 회사의 상명하복 문화가 그대로인 상태에서 명칭만 바꾼 것이다. 이렇게 겉과 속이 다르게 운영될 제도는 차라리 안 하는 게 낫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중요한 것은 '글로벌 IT 기업'의 제도들이 '직원을 위한 복리후생의 개선' 차원으로 시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그들은 제도 시행 목적을 노동자의 권리 향상이나 삶의 질 개선에 두는 것이 아니라, 제도의 변화를 실제 '일의 효율'을 높이고 업무를 최적화하는 도구로 활용한다. 직원들에게 혜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일'을 잘하게 하기 위해 시행하는 제도라는 것이다. 카페테리아에 무료 간식을 비치하는 것은 단순히 그들의 배고픔을 해결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특정 장소에 적절한 간식을 제공함으로써 직원들이 자연스럽게 만나 업무 소통을 늘릴 수 있는 최적의 장소를 '철저하게 계산해서' 제공하기 위해서다.

멋져 보이는 새로운 제도 만들기를 고민하기 이전에, 이미 있는 인사제도나 시스템이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를 점검해보자. 예를 들어 많은 기업에서 시행되는 있는 '360도 피드백'이라 불리는 다면평가 제도에 대해 생각해보자. 360도 피드백은 조직 구성원을 평가할 때 기존의 직속 상사에 의한 평가를 벗어나서, 상사뿐만 아니라 같이 일하는 동료들 그리고 부하 직원까지 다각도로 평가해 평가 결과의 공정성과 객관성을 높이는 제도다.

하지만 이 제도는 어렵게 도입되고도 실제로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사례가 많다. 회사에서 연말에 '360도 평가제도를 언제부터 언제까지 실시한다'고 공지를 내리면, 팀 내 주무를 비롯한 중간관리자들이 조용히 팀원들을 불러 '"팀장님의 평가 결과가 나쁘면, 그 나쁜 평가 결과가 너희한테도 돌아오니 제대로들 평가해"라고 엄포를 주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이와 같은 제도의 실제 시행은 '까라면 까는' 식의 상명하복에 익숙하지 않은 세대에 절망감만 더 크게 안겨줄지도 모른다. 젊은 직원들은 "우리를 위해 더 좋은 제도를 만들어주세요!"가 아닌 "이미 정해 놓은 제도만 제대로 실행해 주시면 돼요!"라고 말한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임홍택 '90년생이 온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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