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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사람과 법 이야기] 연말 법정밖 물정, 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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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날이 꽤 쌀쌀해졌다. 겨울로 접어든다는 강렬한 느낌이 다가온다. 이제 또 한 해를 접고 마무리를 해야 할 시점이 왔다는 뜻이다. 자연스레 스산한 바람 속에서 옷깃을 세우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보니 별무소득, 부질없는 마음만 바빠진다. 올 한 해가 뭘 하다가 또 이리 부산스레 지나가는 걸까. 그사이 한 일은 무엇이고 아직 못다 한 일거리는 무엇일까.

연말을 대비하는 법정도 이 계절이 일러주는 조급한 마음처럼 한 세션을 마무리하기 위하여 바삐 돌아간다. 내년 인사철 이전에 사건을 마무리할 것인지, 아니면 다음 봄 새 재판부로 하여금 결론을 내리도록 넘길 것인지. 이것은 재판부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결단, 선택의 문제에 해당한다. 심리를 충분히 한 사건이라면 응당 이 재판부에서 결론을 내리는 것이 당연하리라. 아직 주된 심리가 진행되기 전이라면 기초적인 준비 작업만 해 놓고 다음 재판부가 충실한 심리를 해 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예상할 수 있는 조처다.

문제는 이도 저도 아닌 어중간한 사건에서 발생한다. 이제 남은 시간을 쪼개어 심리에 박차를 가해 결론을 서둘러 내릴 것인지, 아니면 다소 무리는 따르지만 소송관계인에게 소송 지연의 불가피함을 잘 설득한 뒤 재판부에서 판단을 받아보라고 할 것인지. 자칫 재판부의 애로와 부담을 잘 이해시키지 못하면 법원이 사건 처리를 태만히 한다는 불신을 받을 수도 있는 문제다.

어중간하기는 하지만 심리에 박차를 가하여 끝내려 했는데, 새로이 출현한 복병 때문에 예상과는 달리 실패를 보는 경우도 왕왕 있다. 결론을 내리지도 못할 사건에 매달리다가 정작 결론을 내릴 수 있는 다른 사건 처리에 지장을 초래하는 우를 범한 것이다. 이 때문에 어중간한 사건 처리 방향을 놓고 교통정리를 제대로 해내는 일은 때론 정교한 운영의 묘를 살리는 지혜가 필요한 문제다.

변호사의 입장에서 보자면 사건 처리의 방향이 재판부 뜻과 다를 때 또 다른 차원의 난감함에 봉착하곤 한다. 열심히 일 년간 생고생하며 변론 준비를 해 증인 십수 명을 동원하는 재판을 해 왔건만, 정작 이 시점에 이르러 재판부는 사건을 마무리해 줄 생각이 없음을 알아차렸을 때다. 이런저런 구실을 잡아 자꾸 재판을 뒤로 미루려는 재판부를 향해 야속한 표정을 지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도 부질없어 다음 재판 기일만 받아들고 돌아서 나오는 법정 출입문은 그저 무겁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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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아직 심리를 할 것이 산적해 있는데도, 뭐가 그리 바쁜지 재판장이 서둘러 마무리를 하려고 하는 사건도 있다. 이 사건은 더 심리해 봐야 나올 것이 없고 공연히 쟁점만 복잡하게 될 것이라는 심산임이 읽힌다. 필시 이것은 우리 측이 불리하게 될 징조다. 또 때로는 몇 달 내에 재판부 구성이 바뀔 것이 어느 정도는 예상되는데도 재판장은 점잖지 못하게 그런 일을 뭣하러 신경 쓰냐는 듯한 관조적인 태도를 취하며 오불관언 심리에 몰두하는 경우도 있다. 효율적인 시간 자원의 활용 측면에서 좀 불만스러운 구석이 없는 건 아니다.

재판에 관여하는 전문가들의 인심이 이럴진대, 실제 재판에 현실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분들의 마음은 어떠실까. 다 헤아릴 수는 없더라도 부산함과 허망함이 교차하는 애환 속에 마음앓이를 하고 계실 것이다. 의뢰인에 따라서는 이 시점에 이르면 전략적 관점에서 이 재판부와 다음 재판부 사이에서 어느 편 재판을 받는 것이 더 유리할지를 궁리하기도 하는 모양이다. 허망한 모색이기는 하지만 현실의 법정 바깥세상의 물정, 인심은 그런가 보다 싶고, 꼭 탓할 마음은 없다. 특히 해가 바뀌고 사람이 바뀌어 불확실성이 증폭되는 연말 이 시점에서 더욱 그러하리라.

비단 재판받는 일만 그럴까. 이 무렵이라면 이 계절을 보내는 우리 모두들, 세상사 애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번 겨울이 깊어진 어느 날, 한번 하얀 눈밭에서 세상모르게 뒹굴면 어떨까 한다. 어른이라는 짐을 잠시 내려놓고 소년의 자유로움으로 되돌아가고 싶기 때문이다.

[김상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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