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20 (월)

트럼프 탄핵 증언대 선 美 외교관들의 품격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국익 우선 국가관·전문성 무장,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화법으로 대통령이 망친 외교 현장 고발

美 소프트파워 전파에 자긍심… 외교관계를 현금 이익화하려는 트럼프 방식에 집단적 반기 든셈

미국에 전례 없는 장면이 연일 생중계되고 있다. 직업 외교관 십수 명이 의회 증언대에 차례로 올라 현직 대통령이 망쳐놓은 외교 현장을 생생하게 고발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직업 외교관 특유의 간결하면서도 명확한 화법, 정파를 떠나 국익을 최우선에 두는 국가관, 외교 현장에서의 전문성 등 미 외교관들의 품격이 잘 드러났다. 지난 13일(현지 시각) 시작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탄핵 청문회는 언론들이 "여야 공방을 넘어 정치인과 외교관의 충돌"(워싱턴포스트) "트럼프 정권에 대한 국무부의 복수극"(폴리티코)으로 표현할 정도다.

첫날 윌리엄 테일러(72) 주우크라이나 대사 대행과 조지 켄트(52) 국무부 부차관보가 증인으로 나왔는데, 나라 밖 무대 뒤에서 일해온 외교관을 처음 접한 여론 반응이 의외로 폭발적이었다. '정치적 마녀사냥에 왜 나서느냐'는 여당 의원들의 비방에 이들은 특유의 화법으로 의연하게 대처했다. 트럼프가 주EU 대사에게 조 바이든 전 부통령 수사 상황을 꼬치꼬치 묻는 통화 내용을 폭로한 테일러 대사 대행은 이날 청문회의 단연 스타였다. 그는 공화당 의원들이 '야당에 편향된 것 아니냐'고 몰아붙이자, "나는 로널드 레이건 이래 7명의 대통령 밑에서 정권을 불문하고 일했다"는 한 마디로 정파성을 일축했다. '트럼프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대통령 간 전화 통화 어느 부분이 탄핵할 만한 위법행위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은 더 걸작이었다. "의원님, 저는 탄핵을 결정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닙니다. 그건 당신이 할 일입니다." 자신은 사실 관계만 증언할 테니, 그것이 탄핵 사유가 되는지 판단하는 것은 의원들의 몫이라는 설명이다. 이런 증언 모습에 소셜미디어에는 "테일러 목소리가 전설적 앵커 월터 크롱카이트와 똑같다" "켄트의 나비넥타이는 '남들과 다른 길을 걷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새로운 파워룩"이란 말로 넘쳐났다.

청문회 둘째 날인 15일엔 마리 요바노비치(61) 전 주우크라이나 대사가 단독으로 선다. 트럼프 대통령과 측근들이 우크라이나 정부에 바이든 수사를 종용하는 것을 중간에서 막다가 밉보여 경질된 인물로, 이번 청문회의 주포(主砲) 격이다. 33년 베테랑인 요바노비치는 지난 5월 임기를 두 달 남겨놓고 아무 설명 없이 갑자기 잘렸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분이 안 풀렸는지 7월 25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통화에서 요바노비치를 가리켜 "그 골칫덩이 여자(the woman, bad news)"라며 "어떤 식으로든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말한 것으로 녹취돼 있다.

이어 다음 주 제니퍼 윌리엄스 부통령 외교 보좌관, 커트 볼커 전 우크라이나 특사, 국무부 3인자인 데이비드 헤일 정무차관, 피오나 힐 전 NSC 유럽·러시아 담당 선임국장, 스티브 리닉 국무부 감찰관 등의 공개 증언이 예정돼 있다. 포린폴리시는 "이번 청문회의 최대 승자는 관록과 애국심을 보여준 정통 외교관들"이라고 전했다.

이번 청문회에 외교관들이 몰려나오는 건 단순히 탄핵 사유가 '우크라이나 스캔들'이란 외교 사안이기 때문은 아니다. 오히려 외교관들 사이에 쌓인 좌절과 분노가 우크라이나 스캔들을 통해 터져 나왔다고 보는 게 맞는다. 미 외교관은 정권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국익에 봉사하며 미 소프트파워를 세계에 전파한다는 자부심이 상당하다. 공화당이건 민주당이건 미국의 외교 정책은 큰 틀에서 별 차이가 없었다. 그런데 트럼프 정권 들어 미국 우선주의(America First) 아래 동맹을 '미국 벗겨 먹는 존재'로 규정하고, 모든 외국과의 관계를 국내의 정파적 이익으로 현금화하려는 시도가 이어졌다.

갈등이 첨예한 중동 외교는 부동산업자인 대통령 사위에게 맡겼고, 우크라이나 같은 러시아의 위협에 취약한 동유럽은 트럼프의 개인 변호사와 사업가들이 휘젓고 다녔다. 주요 대사직을 거액 기부자나 트럼프 리조트 회원들에게 나눠줘 국무부가 '트럼프 컨트리클럽'이 됐다는 말도 나왔다. 이번에 우크라이나 사태 관련 외교관 중 바이든 수사에 협조한 유일한 인물이 고든 손들랜드(62) 주EU 대사인데, 트럼프 취임식에만 100만달러(12억원)를 기부한 호텔 재벌이다.

외교관들은 "이런 정부를 대표해 주재국을 설득하는 게 부끄럽다"며 들끓었다. 2017년 초 무슬림 국가 출신들에 대한 입국 금지 행정 명령에 외교관 1000여명이 반대 연판장을 돌린 게 시작이다. 나토 파기 위협, 파리기후협약 탈퇴, 중남미 이민자 진압, 쿠르드족 배신 등 비상식적 외교에 반기를 든 외교관들을 트럼프 측은 '딥 스테이트(Deep State·정권을 흔드는 관료 집단)' '오바마 적폐(hangover)'로 매도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외교관들은 '트럼프가 미 안보를 위험에 내몰았다'는 언론 기고를 하며 사직하는 등, 대사급·고위직 60%가 사퇴한 상태다.

[정시행 기자]

- Copyrights ⓒ 조선일보 & chosun.com,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