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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백영옥의 말과 글] [124]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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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백영옥 소설가


너무 빨리 읽어버릴까 봐 조바심을 내게 되는 책이 있다. 천천히 읽기 위해 결국 소리 내 읽게 되는데, 귀에 들리는 리듬 때문에 ‘시가 노래’라는 걸 명징하게 깨닫게 된다. 최근 그런 희귀한 시집을 만났는데 그는 노르웨이의 시인이었다.

시집 '어린 나무의 눈을 털어주다'에서 '울라브 하우게'에 대한 해설을 읽었다. 하우게는 1908년 노르웨이의 '울빅'에서 태어나 1994년까지 살았다. 그는 어린 시절 연이어 형제 3명을 잃었고 죽음 같은 우울에 빠졌는데, 정신병원을 오가던 그를 살린 건 600여권의 책이었다. 1928년 하우게는 원예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평생 정원사로 매일 노동했다. 그는 한 손에 도끼를 든 채 시를 썼으며, 그의 가장 좋은 시들은 북구의 차가운 숲에서 쓰였다고 한다.

"꽃노래는 많으니/ 나는 가시를 노래합니다/ 뿌리도 노래합니다/ 뿌리가/ 여윈 소녀의 손처럼/ 얼마나 바위를 열심히/ 붙잡고 있는지요." 야생 장미를 읽을 때, 나는 낫을 든 채 노동으로 나무뿌리처럼 거칠어진 시인의 손등을 생각했다. 그러므로 '긴 낫'에서 본 이 시구절 앞에서 코끝이 시려졌다.

"긴 낫에/ 늙은 몸 의지한다/ 풀밭/ 낫이/ 조용히 노래한다/ 내 마음 혼란스러워라/ 괜찮아요/ 풀들이 말한다." 그 어떤 식물이라도 정성스레 키워본 사람이라면 이 말의 뜻을 알 것이다. 살아 있는 것들은 끝끝내 햇빛 쪽으로 몸을 돌리고, 한 가지 안에서도 어떤 잎은 말라가고 어떤 잎은 피어난다는 것을. 모든 것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걸 말이다.

좋은 시에선 차향이, 숲의 땅이나 갓 자른 나무 냄새가 나야 한다고 노래하는 시인은 피오르에 얼음이 얼면 새가 날아와 쉰다는 걸 안다. 까치가 죽은 나무에는 집을 짓지 않는다는 걸, 비가 많고 추운 여름 때문에 시고 푸른 사과지만 ‘없는 사과’보다 더 낫다는 걸 안다. 그가 태어난 울빅은 북위 61도, 빙하에 의해 생긴 피오르 해안지대로 마을에는 천 명 정도의 사람이 산다. 가닿고 싶은 곳이 하나 더 생겼다.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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