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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1 (수)

[이동혁의 풀꽃나무이야기] 한라산 구상나무 보전 위해선 枯死원인 파악이 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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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단풍이 점점 아름다워진다는 건 구상나무에게 있어 좋지 않은 소식일 수 있습니다. 안 그래도 집단 고사하는 마당에 단풍나무 같은 온대성 활엽수에게 자리를 빼앗긴다는 뜻일 테니까요.

구상나무의 비극은 결국 세계의 석학들을 제주도의 한 자리에 모이게 했습니다. 11월 6일부터 8일까지 3일간 한국을 비롯해 폴란드, 러시아, 일본, 대만 등 각국의 학자들이 ‘한라산 구상나무의 보전전략 마련을 위한 국제심포지엄’이라는 제하(題下)에 모여 이마를 맞댔습니다.

자신들의 연구 결과를 공유하며 진지한 토론을 벌였고, 학자가 아닌 분들도 참여해 구상나무 고사 원인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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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어리목 쪽의 단풍



현장답사 일정이 잡힌 심포지엄 마지막 날에도 한라산 단풍이 황홀경으로 빛났습니다. 우리 학술조사 일행은 어리목 코스를 택해 따로 올라갔습니다.

아침에 먹은 쇠고기해장국에 속이 부대껴 거친 호흡과 쇠고기 트림을 쏟아내며 오르고 또 올라 만세동산에 이르자 푸른 구상나무 숲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색깔의 숲이었습니다. 복원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 개체들도 이제는 제법 어른스런 모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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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목에서 윗세오름대피소 가는 길의 구상나무는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윗세오름대피소를 지나 남벽 쪽에 이르니 더 짙은 색의 구상나무 숲이 겹겹이 나타났습니다. 이미 죽었거나 갈변한 것이 섞여 있긴 했지만 숲의 건강성은 대체적으로 양호해 보였습니다. 길게 목을 뺀 새 가지의 길이만큼이나 밝은 앞날이 기대되는 개체가 많았습니다.

성판악 코스나 영실 코스는 구상나무 고사율이 높은 데 비해 남벽 쪽은 고사율이 가장 낮다고 합니다. 일사량이 많아 고온에 시달릴 것 같은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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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벽 쪽의 구상나무 군락도 건강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잎 뒷면을 허옇게 드러내며 말라가는 것 중에 벌레집으로 보이는 것이 많았습니다. 속을 까보니 역시 애벌레가 보였습니다. 그건 작년에 이곳 남벽 일대의 구상나무 숲에서 발견됐다는 큰솔알락명나방의 애벌레였습니다.

구상나무 열매 안쪽에서 종자를 갉아먹는 해충이라고 발표된 녀석입니다. 이 애벌레가 만든 집을 건드리면 구상나무의 잎이 우수수 떨어져 내립니다. 그것만 봐도 구상나무한테 해를 끼치는 벌레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그 안에서 고치를 만들고 번데기가 되어 겨울을 나는 모양입니다.

이번 심포지엄에서 러시아 학자가 발표한 나방류에 의한 전나무류의 피해가 떠올랐습니다. 결정적 이유는 아니겠지만 구상나무 집단 고사의 여러 이유 중 하나로 꼽아도 될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한라산의 남벽 쪽은 볕이 잘 드는 남향이므로 한여름에 고온이 지속될 텐데도 고사율이 낮습니다. 큰솔알락명나방에 의한 피해가 관찰되는 곳인데도 그렇다고 한다면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 이유를 알아낸다면 다른 지역에서의 고사 원인을 규명하는 단서를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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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에 생긴 벌레집(왼쪽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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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레집 속에 들어 있던 큰솔알락명나방의 애벌레



이번 심포지엄에서 구상나무 집단 고사의 원인으로 많은 학자들이 지적한 것이 봄철 가뭄입니다. 본격적인 생육을 시작하는 5월에 비가 많이 와야 하는데 가뭄이 지속돼 말라죽게 됐을 것이라는 추정입니다.

참고로, 제주도의 전체적인 강수량은 많아졌지만 겨울철 강설량이 부족해졌고 봄철 강우량도 감소했다고 합니다. 겨울이 짧아지면서 눈이 일찍 녹아 토양층이 찬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토양온도가 0℃ 이하로 내려가는 일이 빈번해지면서 구상나무 생장에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봄철 가뭄 못지않게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폭우에 의한 토양 유실과 강풍에 의한 뿌리 들림 현상이 원인이라는 지적도 일리는 있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건 그렇지 않은 지역에서의 고사까지 명쾌하게 설명하지는 못하는 것 같아 100% 동의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폭우나 강풍을 동반한 태풍은 아주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현상이고, 최근에는 태풍이 거의 오지 않은 해도 있었기에 구상나무가 대처하기 어려운 자연현상이 아닙니다.

영향을 아주 안 미치는 건 아니겠지만 집단 고사의 비중 있는 원인으로 삼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다만, 폭우와 강풍으로 인해 특정한 토양미생물과의 공생관계가 깨진 데서 원인을 찾아볼 수는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울러 토양층의 급격한 변화에서도 원인을 찾아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노루에게 먹히는 피해를 원인으로 본 발표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노루의 개체수가 아무리 증가했대도 그 많은 구상나무를 죽음으로 내몰 정도의 피해를 주긴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또한 노루가 구상나무만을 먹이로 삼는 동물은 아니므로 피해를 준다 해도 구상나무가 얼마든지 스스로 회복할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에는 백록담에 야생견이 출입해 노루를 잡아먹고 있다고 하니 개체수 증감의 추이를 좀 더 지켜보는 게 좋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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엉겅퀴 종류의 새순을 뜯어 먹는 노루(2010. 5. 20)



제가 개인적으로 꼽는 원인인 봄철 냉해에 대한 지적은 아무도 하지 않아서 좀 아쉬웠습니다. 한라산의 겨울이 짧아지고 봄이 빨리 시작되면서 구상나무들은 매년 서둘러 물을 끌어올려 가지로 이동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한파가 몰려오는 일이 잦아지면서 냉해를 입게 됩니다. 직접적인 잎의 피해도 있겠지만 이동한 물이 얼면서 터지는 가지 쪽의 피해가 심각할 것입니다.

점점 심해지는 일교차에 의해 데미지가 가중되고, 폭염과 폭우와 강풍 같은 극단적인 기상현상이 반복되면서 구상나무 집단의 건강성이 약화되면 병균의 침입이 용이해지고 충해를 자주 겪게 되면서 결국 떼죽음으로 이어졌을 거라는 추정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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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세오름 쪽에서의 상고대 피해(2018. 5. 3)



차윤정 박사님의 명저인 ‘신갈나무 투쟁기’의 140쪽에는 나무가 냉해를 입고 죽어가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가지에 물을 끌어올려 생장에 가속도를 붙인 나무가 갑작스레 찬 기온에 노출되면 물기가 얼음으로 변하면서 부피가 커져 나무의 세포를 파괴하고, 그 상해 조직은 다른 병충해에도 약해져서 정상적인 가지까지 위험에 빠뜨린다고 합니다.

그렇게 나무가 추위로 곤욕을 치르는 것은 겨울이 아니라 봄이라고 합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나무가 부지런히 물올리기를 시작하고 신록을 피워내는데 그렇게 조직이 연하고 체내 수분이 많은 봄철에 갑작스럽게 저온현상이 발생하면 나무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작년 5월 초순에도 한라산에 갑작스런 추위가 몰아닥쳐 상고대가 발생하기까지 했습니다. 봄을 맞아 가지에 잔뜩 물 올리고 있던 고지대 나무들에게는 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발생한 상고대가 빨리 녹지 않아 오래도록 가지를 얼려버리면 결국 냉해로 진행될 것입니다. 상고대가 생겼다 하더라도 볕이 잘 드는 곳에서는 금방 녹아 큰 해로 진행되지 않을 것이고요.

일사량이 많은 남벽 쪽이 상대적으로 봄철 냉해가 적으므로 구상나무 고사율이 낮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그래서 해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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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옇게 변한 백록담 아래로 상고대 피해를 입은 구상나무가 보인다(2018. 5. 3)



구상나무의 고사를 1970년대부터 관찰했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자연스런 죽음을 목격한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자연의 선택(selection)이 일어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구상나무의 죽음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기 어려운 이유는 집단 고사 현상이 너무 급격하게 나타난다는 데 있습니다. 숲을 비롯한 생태계는 자연 치유의 능력이 있습니다. 여러 이벤트가 있어도 시간이 지나면 알아서 잘 회복하는 능력 말입니다.

시간은 곧 속도의 문제입니다. 제 생각에는 구상나무 숲이 회복되는 속도보다 죽어가는 속도가 더 빨라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구상나무가 환경변화에 대처하는 시간보다 환경변화의 진행 속도가 너무 빨라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가 한라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리산 같은 곳에서도 보고되고 있다는 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태의 심각성이 크다는 방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떼죽음의 원인을 제대로 밝히지 않은 채 무조건적으로 인공식재에 의한 복원을 시행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보입니다. 자칫 밑 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수 있고, 아까운 시간과 비용이 허비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저러한 논의에 비해 약간은 생뚱맞다 싶은, 그러나 아주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발표가 있기도 했습니다. 한국특산식물인 구상나무가 유사종인 분비나무와 다른 종이 맞는가 하는 연구에 대한 결과입니다.

구상나무는 최후빙기(LGM) 이후 높은 산지를 중심으로 고립되어 진화하면서 분비나무와 분지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지리산처럼 구상나무와 분비나무가 혼생하는 지역으로 간주되는 곳이 있다는 것은 찜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구상나무 발견 소식이 최근에 속리산에 이어 소백산에서도 들려왔습니다. 그것이 정말로 분비나무가 아니라 구상나무가 맞는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두 종은 차이가 확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상나무와 분비나무의 가장 큰 차이점은 솔방울조각의 끝이 아래로 젖혀지느냐 아니냐 하는 점에 있습니다. 젖혀지면 구상나무, 젖혀지지 않으면 분비나무로 봅니다. 그러나 어느 각도에서부터 아래로 젖혀진다는 표현을 쓸 수 있는 건지 경계가 모호합니다.

설악산의 안산이나 한계령휴게소 부근에서 자라는 분비나무는 솔방울조각 끝의 젖혀진 양상이 분비나무보다 구상나무에 가까운 형태를 보입니다. 그래서 저 같은 사람들은 구상나무를 분비나무와 구분해 독립된 종 수준으로 다루는 데 회의적입니다.

구상나무를 종보다 낮은 변종 수준에서 다루거나, 아니면 아예 분비나무와 같은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합니다. 자칫 한국특산식물 하나를 잃어버리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긴 하지만 올바른 학문을 한다면 그런 것들은 넘어서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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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상나무의 열매는 솔방울조각 끝이 아래로 젖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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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비나무 열매는 솔방울조각 끝이 젖혀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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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의 분비나무 중에는 구상나무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도 있다(설악산 서북능선)



미국 하버드대의 윌슨 박사가 구상나무를 한국특산식물로 알아본 것은 1917년입니다. 그때로부터 100년이 더 흐른 지금은 학문이 많이 발전했습니다. 지금에 와서 구상나무를 분비나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나무로 간주한다고 해서 1910년대로 회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그 시대에는 할 수 없었던 방법으로 식물을 판별할 수 있게 되었다 보니 여러 식물에 대한 그동안의 견해나 학설이 수정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그중 하나로 구상나무가 거론되는 건 결코 억지스런 일이 아닙니다.

구상나무가 종 수준에서 다룰 만한 나무가 아니라는 판정이 나더라도 미래를 향한 노력을 절대 게을리해서는 안 됩니다. 구상나무가 한국특산식물이어서가 아니라 한라산 생태계의 건강성을 가늠하는 척도라서 보전전략을 마련해야 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면 말입니다.

큰부리까마귀가 내려다보는 세상이 결코 불길함으로 가득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가 꼭 보여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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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가 많이 진행되고 있는 관음사 하산 코스의 구상나무



이동혁 풀꽃나무칼럼니스트(freebowl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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