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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30th SRE][letter]신용과 현대 경제의 마법의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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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준 금융위원회 공정시장과장]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사피엔스(Sapiens)’에서 근대와 현대 경제시스템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신용’에 대한 입장 차이를 제시한다.

근대는 신용이 거의 없는 상황, 현대는 신용이 많은 상황을 말하며, 여기서 신용이란 미래에 대한 신뢰를 말한다. 좀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미래가 현재보다 나을 것이라는 신뢰’를 의미한다.

역사적으로 신용의 개념은 고대 수메르부터 존재하였다. 물물교환 대신 화폐를 이용한 교역이 발생하면서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붙여 갚는 신용거래의 원형이 당시부터 존재하였다고 알려진다.

다만, 현대 경제로 이행하기 이전에는 더 나은 미래, 즉 성장에 대한 기대가 미약하였으며 신용은 제한된 형태로만 존재하였다. 현대 시장경제가 태동하면서 미래 성장에 대한 기대가 커지고 더 많은 신용이 허락되었으며, 이것은 더 많은 생산 활동, 더 많은 이윤으로 이어져 다시 새로운 신용을 창출하는 선순환의 고리가 형성되었다. 유발 하라리는 이것을 ‘현대 경제의 마법의 원’이라고 지칭하였다.

회계적 관점에서 보면, 신용(credit)은 복식부기의 대변(credit)의 용어로도 쓰인다. credit의 어원을 보면, 라틴어 credere인데, 이는 ‘다른 사람이 빌려주다’는 의미이다. credit의 반대편인 debit(차변)은 거꾸로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다’는 의미인 debrere에서 기원 했다고 하는데, 사업 활동은 결국 다른 사람에게 빌려와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는 과정에서 이윤을 남기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신용의 순환 고리가 끊어지는 순간 사업 활동도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결국 현대 시장경제에서 신용이라는 것은 경제의 순환과 성장을 의미하는 가장 핵심적인 단어라 할 수 있다. 더 많은 신용은 미래에 대한 더 많은 신뢰를 의미하며 결국 더 많은 성장을 낳는 시발점이 된다. 이러한 측면에서 ‘신용 평가’는 신용에 기반한 시장경제라는 마법의 원을 돌리는 마법사의 주문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이러한 측면에서 현대적 의미의 신용평가산업이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태동하였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세계 3대 신용평가사인 무디스(Moody’s, 1900년), 스탠다드 앤 푸어스(Standard & Poor’s, 1860년 설립된 Poor’s와 1916년 설립된 Standard Statistics가 1941년 합병), 피치(Fitch, 1913년)가 설립되고, 회사채 등 신용 금융상품에 대한 전문적인 평가가 이뤄지면서 미국의 금융시장은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하게 된다.

‘신용 평가’는 신용을 제공하려는 자에게 신용이 필요한 자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평가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신용의 수요와 공급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용평가가 하나의 ‘산업’으로 성장하면서, 구조적인 한계를 내포하게 된다.

신용 평가를 받는 입장에서는 긍정적인 정보는 적극적으로 공개하지만, 부정적인 정보는 가능한 은폐하려는 행태를 보이게 된다. 이에 따라 신용의 수요자와 공급자 사이에 ‘정보 비대칭(information asymmetry)’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신용평가사는 이러한 정보 비대칭을 해소하는 역할을 수행해야 하지만, 신용평가사가 평가를 받는 기업으로부터 수수료를 받는 구조에서는 이러한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즉 신용평가사가 평가를 받는 기업에게 포획(capture)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고, 이는 신용평가의 실패로 이어지게 된다. 복잡한 구조의 증권화 상품이 증가하면서 이러한 문제는 더욱 증폭되게 되었다. 그 결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우리나라의 동양사태 등 최근 10여년 사이에 발생한 신용위기의 이면에는 어김없이 신용평가산업의 구조적 문제가 자리잡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감독과 시장규율을 강화해 나가는 것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미국의 경우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도드-프랭크 법(Dodd-Franck Act)을 제정하면서 SEC 내에 신용평가 전담부서(Office of Credit Ratings)를 설치하고 신용평가산업에 대한 감독을 한층 강화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2016년 ‘신용평가시장 선진화 방안’을 발표하고 신용평가 비교·공시 확대, 신용평가사 불건전 영업행위에 대한 제재 강화, 이해상충 방지체계 마련 등 일련의 조치를 시행한 바 있다. 다만, 감독과 제재의 강화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는데 부분적인 도움을 줄 뿐이다. 신용평가시장의 참여자들이 시장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울러 신용평가에 과도하게 의존하는 관행을 시정하고 채권자·투자자가 자체적으로 신용리스크를 분석할 수 있는 능력을 확충해 나가는 것도 필요하다.

신용이 신용을 낳는 현대 경제의 마법의 원은 이러한 신뢰가 이어져 나갈 때만 가능한 것이다. 더 많은 성장과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기대는 이러한 신뢰가 지켜질 때만 가능한 것이다. 공정하고 투명한 신용평가는 현대 경제의 마법의 원이 깨어지지 않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원칙 중 하나이다. 이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경우 신뢰의 연결고리는 깨어지고 더 이상 마법은 통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 기고는 이데일리가 제작한 30회 SRE(Survey of credit Rating by Edaily) 책자에 게재된 내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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