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출신 미디어 디자이너 레픽 아나돌
DDP 라이트 축제서 '서울 해몽' 펼쳐
머신 러닝으로 "모두를 위한 예술"
DDP 라이트에서 선보일 레픽 아나돌의 '서울 해몽'의 예상 이미지. [사진 서울디자인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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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20일부터 2주간 밤 8~10시 사이에 DDP라이트 축제가 열린다. 레픽 아나돌이 매인 작가, 민세희가 총감독으로 참여하는 공공 예술 축제다. DDP라이트 '서울 해몽' 포스터. [사진 서울디자인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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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이 꿈을 꿀 수 있을까. 그 자리의 역사를 기억하고, 주변 사람들과 함께 숨 쉬고, 자신이 꾸는 미래에 대한 꿈을 사람들에게 풀어놓을 수 있을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지만, 올겨울 서울 동대문에 자리한 DDP(동대문 디자인 플라자)에선 사람들이 상상해보지 않던 독특한 풍경이 펼쳐질 예정이다.
12월 20일부터 내년 1월 3일까지 2주 동안 DDP가 거대한 빛의 캔버스로 변신한다. 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이 올해 처음으로 여는 미디어 파사드 축제 'DDP 라이트(LIGHT)'가 이곳에서 열리는 것. 미디어 파사드는 건축물 외벽에 영상을 투사하는 방법으로 다양한 콘텐트를 보여주는 영상 예술로, DDP는 이 기간에 이미지·영상·사운드가 어우러진 대규모 미디어 디자인 '서울 해몽'을 선보일 예정이다. 요즘 세계 미디어 디자인 분야의 스타 레픽 아나 돌(34·Refik Anadol)이 메인 작가로 참여하고, 민세희 총감독이 연출을 맡는다.
지난 7일 한국을 방문해 기자들과 만난 레픽 아나돌(왼쪽)과 민세희 총감독. [사진 서울디자인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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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출신의 미디어 아티스트 아나돌은 지난해 가을 LA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100주년 기념 작품을 선보여 세계를 깜짝 놀라게 한 바 있다. LA의 랜드마크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금속 외벽에 펼친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꿈(WDHC Dreams)'이었다. 당시 뉴욕타임스는 '콘서트홀이 테크노 꿈을 꾼다'는 제목의 기사에서 "프랭크 게리가 설계한 건물이 아나돌의 지휘로 공연을 벌였다"고 전했다. 100년의 역사를 담은 58만여 개의 이미지 파일, 1880개의 동영상 파일 등 총 44.5테라 바이트에 달하는 데이터로 조합돼 연출된 '첨단 테크놀로지 퍼포먼스'였다.
아나돌은 미디어 아트를 건축과 접목하고, 그것을 머신러닝(Machine learning)과 같은 AI(인공지능) 기술로 풀어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받았다. 그의 작품은 마치 보는 사람이 3D 체험 공간에 들어간 듯이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체험을 끌어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나돌은 다국적 출신의 건축가·인류학자·엔지니어·사운드 디자이너 등 12여 명의 스튜디오 동료들과 함께 어마어마한 분량의 데이터(사진·동영상)를 수집하고, 이를 AI에 학습시키는 방식으로 작업한다. 최근 한국을 찾은 그는 "오랫동안 아시아 문화를 사랑하고 동경해 왔다"면서 "서울의 자연과 문화 등 모든 것이 경이롭다. 직접 와서 보니 '서울 해몽'을 풀어낼 AI에게 더 많은 내용을 학습시키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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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P 자체가 매력적인 캔버스
오는 12월 20일부터 2주간 거대한 미디어 아트를 위한 캔버스로 변신할 DDP. [사진 서울디자인재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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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 "LA에서 작품을 준비해오며 이미지는 수없이 봤지만 직접 본 것은 처음이다. 실제로 보니 말할 수 없을 만큼 좋다. 더구나 이 건물을 설계한 자하 하디드(1950~2016)는 내가 존경하는 '5인의 건축 영웅' 중 한 사람이다. DDP 건물은 그 자체로 캔버스로서 충분한 매력을 갖고 있다."
Q : 어떤 매력인가.
A : "난 건축물 그 자체가 메시지라고 생각한다. DDP는 미니멀 형태로 매우 현대적인 동시에 미래에 대한 소망을 담아낸 복합문화공간이다. 이곳의 역사와 문화까지 담아내 '서울 해몽'을 만들 생각을 하니 설렌다."
A : "건축은 단지 건물이 아니라 그 자체가 문화다. 인간의 가장 높은 수준의 창의력이 필요한 일인 데다 그 나라의 환경과 역사를 응축해 드러내 준다. 하지만 난 어릴 때부터 건축이 현실 속에 갇혀 있다는 게 싫다는 생각을 했다. 좀 엉뚱하게 들리겠지만, 어릴 때 인상적인 건물을 보면 건물도 생각할까, 저 창문은 나를 기억할까 등의 상상을 많이 했다. 중력을 가지고 서 있는 건축물에 새로운 재료와 방식으로 숨결을 불어넣고 싶었는데, 빛과 AI를 가지고 내가 하는 작업이 바로 그런 일인 것 같다."
아나 돌은 그러면서 자신이 존경하는 다섯 명의 건축가로 프랭크 게리와 자하 하디드, 이토 토요, 안도 다다오, 다니엘 리베스킨트를 꼽았다. 이어 "내 작업은 건물이 언제, 어떻게, 왜 세워졌는지 공부하는 데서 시작된다. 건축물은 그 지역의 문화와 연결돼 있어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정"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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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대문의 역사, DDP의 꿈…'서울 해몽'
'서울 해몽'은 아나돌이 표현한 대로 DDP를 캔버스로 이 건물의 기억(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상징적인 이미지를 각각 4분, 6분, 6분 등 총 16분량의 영상으로 풀어낼 예정이다. 그는 "AI를 통해서 디피가 자기 인식을 가진 존재처럼, 마치 DDP가 꿈을 꾸고 있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Q : 작품을 위해 많은 데이터를 수집했다고.
A : "물론이다. 지금까지 서울의 역사와 문화를 담기 위해 600만개 정도 SNS 이미지와 35000개 정도 과거 이미지를 모았다."
AI가 펼쳐주는 이야기
레픽 아나돌, Infinite Space, 2019, 미국 워싱턴DC. [사진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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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픽 아나돌, Melting Meomories, 2018.[사진 레픽아나돌 스튜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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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당신의 작업을 좀 더 설명하면.
A : "쉽게 말하자면 내겐 건물이 캔버스이고, 빛이 물감이다. 그리고 붓을 움직이는 것은 바로 AI의 의식인 셈이다. " 그는 이어 "작품은 머신 러닝을 통해 수집한 데이터를 시각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라며 "'서울 해몽'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탐구하는 여정이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미래와 기술, 그리고 휴머니티 등의 주제에 대해 눈을 뜨게 해준 두 가지 사건으로 여덟 살 때 영화 '블레이드 러너'(1982, 리들리 스콧 )를 보고, 같은 해 부모님으로부터 컴퓨터를 선물 받은 일을 꼽았다. SF (Science Fiction·공상과학) 매니어로 자란 그는 이스탄불에서 시각예술을 전공하고 27세에 미국으로 건너가 UCLA에서 미디어 아트를 전공했고, 현재 UCLA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2018년 미국로스앤젤레스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LA 필하모닉 200주년을 맞아 선보인 레픽의 작품. 백남준에 대한 오마주가 엿보인다.[사진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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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의 꿈(WDHC Dreams)'을 유튜브 영상으로 보니 백남준 작품이 떠오르더라.
A : "데이터를 가지고 사각 모양으로 구현한 이미지들은 백남준 작품에 대한 오마주였다. 백남준은 미디어 아트 분야에서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지금까지 그보다 더 큰 영향력을 끼친 아티스트는 없었다고 본다. '서울 해몽'에서도 그에 대한 오마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Q : 작업에 AI(인공지능)를 활용하게 된 계기는.
A : "구글 엔지니어 마이크 타이카(Myke Tyka)를 만나 그로부터 머신 러닝에 대해 배우며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났다. 내가 데이터를 재료로 작업한 것은 2011년부터이지만, 그것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의미가 없는 결과물이 나오기도 했고. 하지만 AI를 사용하면서 좀 더 작품이 심오해지고 다른 의미를 갖게 됐다. 앞으로 인공지능으로 인해 전 세계가 크게 바뀌지 않을까 싶다."
Q : 인공지능 때문에 이미 미술계도 많이 달라지고 있다.
A : "누구보다 앞서 머신 러닝을 이렇게 미학적으로 활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나는 운이 좋았다. 어릴 때부터 항상 상상하고 미래를 꿈꿔 왔지만 지금 내가 이런 작업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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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를 위한 공공 예술(public art)
Q : 건축물을 재료로 쓰는 당신의 작품은 공연인 동시에 규모가 큰 미술 작품 같다. 무엇보다 공공 예술(public art) 작업에 집중한다고.
A : "누구나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을 만드는 게 내 꿈이었다. 예술은 인종, 지역 등의 출신과 배경을 떠나 누구나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공공 미술, 즉 모두를 위한 예술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예술 형식이라고 생각한다. 솔직히 나는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작품 보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거기에 작품이 있을 것'을 미리 알고 문을 열고 들어가야 작품을 만나는 그런 공간엔 오히려 편견이 개입된다. 문도 없고, 정해진 시작과 끝이 없다는 것, 이게 바로 공공 예술의 가장 큰 매력이다. "
아나 돌은 "소수 개인이 아니라 대중을 염두에 두고 작업해야 한다는 점에서 공공 예술은 아티스트에게 훨씬 도전적"이라며 "책임감도 크게 느끼고 있다. 하지만 공공 예술은 더 많은 사람에게 영감을 줄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도전이 좋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미디어 아트는 단순히 기술 그 자체에 열광하는 '테크놀로지 페티시(technology fetish)"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야 한다"면서 "내가 하는 일은 문화 저변에 있는 것들을 건물의 외관으로 끌어올리는 작업을 기술을 통해서 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Q : 마지막으로 묻자. 당신에게 '빛'은 어떤 재료인가.
A : A : "빛은 굉장히 신성한 재료다. 빛이 없으면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은 빛에서 왔다. 종교에서도 빛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고, 기계에도 중요하다. 빛은 무게가 없고 해가 없고 존중받아야 마땅한, 편견 없는 재료다. 상상력과 결합한 빛은 우리를 어디든 가게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빛은 아티스트로서 내가 쓸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멋진 재료다. "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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