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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산책자]출판 진흥의 빅텐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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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이 가까워 오자 인터넷서점에서는 ‘올해의 책’ 행사를 시작했다. 독자 투표로 뽑는 행사 페이지에 한 해를 결산하는 의미가 담겨서 설레는 기운이 전해진다. 매일 바뀌는 득표수도 궁금하고 책을 꼽는 독자의 성향이 어떤지, 좋은 표지에 대한 대다수의 생각이 어떤지 알고 싶어서 나는 수시로 그 페이지에 들락날락한다.

경향신문

하지만 인터넷서점의 페이지를 벗어나면 그 활기와는 다른 침울한 출판인들을 만나게 된다. 연말 결산에 어둠이 깔린 분위기다. 올해에만 유독 호응받지 못할 책을 출간한 것도 아니고 자기만족에 가까운 출판을 한 것도 아닌데 세상 속에서 소통하지 못하는 책들이 늘어나고 있다. 출판산업의 전반적인 흐름이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기획, 편집, 마케팅의 업무 시스템을 잘 갖춘 규모 큰 출판사나 출간 결정이 빠르고 주제 선별이나 장르 등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1인 출판사는 올해 결산 실적이 좋았다는 예외적인 소식도 들린다. 큰 출판사의 마케팅 파워와 저자 섭외력이 좋은 것일까. 혹은 출간 종수가 많다 보니 서점에서, 또 기관에 선정·납품되어 세상을 만나는 책이 그만큼 다양하고, 따라서 판매율이 높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렇게 판로가 열리면 그 뒤의 책들은 재정적으로 심정적으로 세상을 만나기가 여유로워진다. 1인 출판은 주로 저자를 겸하는 발행인이 마니아 독자를 상정하여 좀 더 색다른 책, 기존 출판물에서 보기 드문 독립출판물 형태의 출간을 시도함으로써 새로운 가능성을 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한 해 일정 종수의 책을 출간하는 한국 출판사의 80%는 100인 이상 규모의 큰 출판사도 1인 출판사도 아니다. 5명에서 20명 사이의 직원이 함께 꾸려가는 곳이다. 만드는 한 권 한 권이 출판사의 재정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다. 한 권을 만들 때마다 타깃 독자를 설정하고 손익분기점을 계산하여 편집, 홍보 마케팅을 한다. 그렇게 출간된 한 권이 출판시장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그다음 출간에 부담이 되는 규모다.

내가 그동안 배웠고 실천하고 있는 건 책 한 권이 꼭 하나의 세상이라는 생각. 그 한 권 한 권이 독자를 만나고 그 책들의 리스트가 쌓일수록 출판사도 단단해질 거라던 생각을 이제는 수정해야 한다는 위기감도 있다. 더 이상 출판시장이 확대되지 않기 때문이다. 새로운 독자들이 독서계에 유입되지 않는다. 신간을 출고하고 초기 주문이 들어오면 출판인은 열띤 표정으로 “책이 움직인다”라고 표현한다. 몇 년 전부터 이 움직임이 너무 빨리 멈춘다. 한 달이었던 초기 반응은 보름 정도로 줄고, 요즘은 불과 며칠 사이에도 관심이 끊긴다. 한정된 독자가 초기에 그 움직임을 좌우하며, 그 움직임이 멈추면 책은 그대로 창고로 묶이는 형국이다.

출판 기획이 신선하고 만듦새가 좋아도 독자층이 확대되지 않으면 딱 팔리는 만큼만 팔릴 게 분명하다. 본의 아니게 한정본 출판을 하게 된다. 오늘 준비하고 만든 것만 팔겠다는 소신 있는 음식점을 출판사는 흉내 낼 수 없다.

출판 현장에서는 독자 취향과 세상의 흐름을 공부할 기회가 꽤 많다. 주로 기획 성공 사례나 출간 후 독자를 만난 경험을 공유하고 배운다. 하지만 아무리 출판 공부를 많이 해도, 독서 진흥을 위한 정책, 독자 연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몽상에 가까운 결과를 낳는다. 출판사가 아니라 독자가 적은 게 문제다.

출판은 근본적으로 독자를 위해 존재한다. 어떤 사적인 기록도, 어떤 공공의 학술 발표 결과물도 누군가에게 읽혀야 의의가 있다. 때로 기념 삼아 출간하는 자비출판물도 기록하는 이에게 방점을 둘망정 독자라는 존재가 사라지지는 않는다. 출판인 서로에게 위로가 필요한 시점은 아니다. 어떤 대책과 모색을 함께해야 한다고 출판인들은 말한다. 어려움을 나누어 지는 것, 힘들다는 토로에서 전염되는 비애감을 맛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명감이 있다.

출판을 진흥한다는 건 출판정책을 바로 세우고 유통과 출판 질서의 합리적 규범을 마련하는 산업적 측면 외에도 독서 장려, 독자 창출 정책을 함께 이뤄나가는 걸 의미한다. 출판 진흥이 출판사의 밥그릇 크기 문제를 뛰어넘어 독서를 진흥하는 길로 나아가야 한다. 독서 교육, 도서관 개발과 활용, 시민 독서단체의 활동이 출판 진흥의 틀을 만들고 독서 진흥의 빅텐트를 도출하는 것이다. 출판인에게 독자는 경제적 원천 이상이다. 더 근본적으로 책의 가치, 의미를 만들어주는 존재다. 출판 진흥과 독서 진흥이 같은 트랙에서 논의될 때 연말 책의 결산이 더 뜻깊어진다. 책은 독자의 것이기 때문이다.

정은숙 마음산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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