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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1 (토)

[여적]21세기 흑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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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42년 이집트 북동부 펠루시움(현재 포트사이드) 인근에서 열병이 발생했다. 경미한 열로 시작해 사타구니나 겨드랑 등이 부풀어 오르는 증상이 나타났다. 그러다 저절로 치료되기도 했다. 하지만 악화되면 죽음을 알리는 검은 고름집이나 등창이 온몸을 뒤덮었다. 흑사병이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동로마제국 황제도 전염병을 피해갈 수 없었다. 다행히 살아났지만 이유를 몰랐다. 단지 황제의 소박한 식사 때문일지 모른다고 추정할 뿐이었다. 경작자를 잃은 제국의 도시는 텅 비었고 추수할 곡식과 포도나무는 땅에서 시들어갔다. 전염병은 사라졌다 발생하기를 반복하면서 52년간 지속됐다.

800여년이 흘러 1300년경 흑사병은 중앙아시아의 평원지대에서 출현했다. 실크로드를 오가는 유목민을 통해 서쪽으로 이동했다. 1340년대 말 아시아와 유럽의 접경지역에서 노예무역을 하던 이탈리아 상선이 전염병을 유럽으로 실어날랐다. 10년간의 창궐로 유럽인구의 30~60%가 사망했다. 심리적인 불안은 미신을 증폭시켰고 부랑자, 유대인, 한센병 환자들이 발병자로 지목돼 살해됐다. ‘흑사병 의사(Medico della peste)’들도 출현했다. 그들은 새부리 모양의 가면과, 장갑, 장화, 챙 달린 모자, 발목까지 오는 겉옷을 입었다. 흑사병 의사 가면은 지금도 이탈리아에서 기념품으로 팔린다.

19세기 프랑스 화학자 루이 파스퇴르가 발병 원인과 치료법을 발견했다. 그렇다고 박멸된 건 아니다. 21세기에도 매년 흑사병 환자가 발생한다. 아프리카 지역에 많다. 중국에서는 2014년 3명, 2016년, 2017년에는 각각 1명이 사망했다. 지난 12일 중국에서 2명이 흑사병 판정을 받은 데 이어 17일에 추가 환자가 나왔다. 괴담도 돌고 있다. 흑사병 환자 발생 사실이 20여일이 지난 뒤에야 공개됐기 때문이다. 그 사이 확산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03년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발병 때도 당국이 보안에 급급하다 전염병을 키운 사례가 있다. 중국 당국이 흑사병 관련 온라인 토론의 통제에 들어갔다고 한다. 교통수단의 발달로 전염병은 하루도 안돼 지구 반대편으로 확산될 수 있다. 과거엔 전염병 확산이 무지에서 왔지만 이젠 은폐의 결과일 수 있다.

박종성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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