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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9 (화)

[구정은의 '수상한 GPS']‘외지 출생 40%’ 복잡한 홍콩…민족주의에 가려진 '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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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살 앳된 청년이 집으로 들어오자 아이들이 뛰어가 반긴다. 장난감이 쌓여 있는 좁은 방 안에 몸을 뉘인 청년은 직장까지 그만두고 시위에 참여하고 있다. 아파트에 사는 6살, 3살 두 아이와 어머니 ‘막’은 청년과는 남남이다. 하지만 시위대를 돕고 싶어서 잠자리 겸 은신처를 내준 것이다.

반년 가까이 시위가 이어지면서 경찰에 체포된 사람이 5000명이 넘는다. 그러자 곳곳에 막의 가족처럼 시위대를 돕는 이들이 생겨나고 있다. 21일 로이터통신은 격렬한 정치적 갈등 속에서 이타주의와 이색적인 ‘공유경제’가 생겨나고 있다며 장기화된 시위가 만들어낸 풍경들을 전했다. 하지만 주말마다 이어지는 시위 중에는 오성홍기를 홍콩 깃발과 함께 흔드는 ‘친중국’ ‘친베이징’ 집회도 적지 않다. 지난 16일에도 수백 명이 의회 격인 입법원 앞에 모여 “경찰 지지”를 외쳤다.

경찰과 시위대 사이에 선 시민들

이공대가 봉쇄된 지난 15일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여론조사를 보면 대학과 도로를 점거하는 시위에 대해 주민 54%는 ‘지지한다’고 했고, 46% 반대했다. 거의 반반으로 갈린 셈이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것은 중문대 커뮤니케이션센터의 여론조사다. 지난달 조사에서 ‘보편적 참정권’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80%로, 그 전 달의 74%에서 늘어났다. 시위 양상과 관련해 ‘경찰이 지나친 무력을 행사한다’는 사람은 70% 정도로 지난 몇 달 간의 조사에서 거의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시위대가 지나친 폭력을 쓰고 있다’는 사람 역시 40%로 거의 고정적이었다.

2014년 우산혁명 때 시위대가 센트럴 등 도심 상업지구를 점거하자, 경제적인 이유로 시위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다. 본토와의 경제적 관계를 중시하는 이들은 ‘결국 중국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홍콩의 경제나 인구 통계를 보면 반중 정서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기는 힘든 구조다. 홍콩은 그 자체로 세계 33위 규모의 경제권이고, 미국 하버드대 국제개발센터가 개발한 경제복잡성지수(ECI)로는 세계 38위다. 2017년 1인당 총생산(GDP)은 4만6200달러로 높은 편이지만 마카오의 8만800달러, 싱가포르의 5만7700달러보다는 적었다.

중국 경제성장의 견인차라고는 하지만 홍콩의 경제적 자립도는 낮다. 2017년 수출액은 1360억달러, 수입액은 6080억달러다. 금융·정보기술(IT)·교육 등이 중심이어서 제조업 생산품이나 식료품은 외부 즉 본토에 주로 의존하고 있다. 2017년 홍콩은 중국에 164억달러 어치를 팔고 2550억달러 어치를 사들였다. 홍콩 증시 상장기업의 절반은 본토 회사들이다. 본토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주민 40% ‘외지 출신’…본토인을 보는 토박이의 반감

서울시립대 성근제 교수는 “국내 언론이나 시민들은 이번 사태를 ‘홍콩 대 중국(공산당)’의 틀로 보지만 이에 못지 않게 주목해야 할 부분은 홍콩 내부”라면서 “홍콩은 비록 작은 사회이지만 내부의 복잡성과 긴장도는 상당히 높다”고 지적했다. 가장 최근에 실시된 2016년 인구조사를 보면 주민들 상당수는 본토 출신들이다. 주민 734만명 가운데 홍콩에서 태어난 사람은 445만명으로 60%를 간신히 넘겼다. 31%인 227만명이 본토·마카오와 대만 태생이다. 전체 인구의 20%는 홍콩에 산 지 10년이 안 됐고, 연령대로 보면 40대 이상이 많다.

일국양제 시스템이나 반중 시위 등을 바라보는 본토 출신의 의견을 따로 물은 조사는 없다. 장정아 인천대 교수는 “본토 출신이라 해도 정체성이 고정돼 있지는 않다”고 지적한다. 문제는 ‘중국인이 아닌 홍콩인’이라고 스스로를 규정하는 이들이 그동안 본토 출신들을 2등 시민 취급해왔다는 사실이다. 시위에 적극 참여하는 강경파 청년층 중에도 본토에서 온 이주자들에게 적대감을 가진 이들이 많다. 홍콩 당국은 오래 전부터 본토 출신 이주자를 하루 150명으로 제한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주자를 더 줄이라는 요구가 나오곤 한다. 이런 분위기가 본토 출신들을 오히려 친정부(친중국) 정서에 쏠리게 만든다는 분석도 있다. 장 교수는 “다만 근래에는 지역공동체 활동을 중심으로 출신지역과 상관 없이 서로를 끌어안으려는 움직임이 늘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민족주의에 가려진 계급갈등

로이터통신은 시위를 주도하는 젊은이들이 점점 심해지는 빈부격차에 반발하면서도 정작 계급적 갈등의 대상에 대해서는 숙고하지 않는 점을 지적했다. 이들은 천문학적인 집값, ‘계층이동 사다리’가 끊어진 현실, 극심한 빈부격차를 비판하지만 리카싱 같은 ‘수퍼 리치’들을 공격하기보다는 본토에서 온 이주자들을 적대시한다는 것이다. 홍콩이 세계적인 금융중심지인 동시에 자본 도피처라는 사실은 외면한다.

장 교수는 “영국 통치 시절부터 홍콩 당국은 경제적·계급적 격차가 아닌 ‘본토 대 홍콩’의 프레임을 짜왔고, 이는 홍콩이 중국에 귀속된 이후에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겉보기와 달리, 경제적 폭발요인을 민족주의 정서로 대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베이징과 홍콩 사이에 모종의 공모가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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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가 길어지자 홍콩 경제의 타격을 거론하는 이들이 많다. 안팎에서 홍콩 경제가 무너진다고 소란을 떨지만 정작 중국의 큰손들은 투자 기회로 본다는 분석도 있다. 중국으로의 ‘경제적 귀속’은 오히려 더 심해질 수 있다는 뜻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중국 본토 투자자들이 시위가 격화된 6월 이래로 홍콩에 투자한 액수가 200억달러에 이른다고 보도했다. 홍콩의 올 3분기 경제는 전 분기보다 3.2% 위축됐고 10월 이후 홍콩은 10년만에 공식적으로 ‘침체’에 들어갔다. 비즈니스인사이더는 “그러나 투자자들은 시위가 길어지면서 상황을 점점 덜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고, 오히려 디스카운트된 가격에 기업들을 살 기회로 본다”고 보도했다.

구정은 선임기자 ttalgi21@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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