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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3 (월)

이슈 미술의 세계

유토피아 vs 디스토피아, 현실 vs 비현실… 국내외 작가들 경계를 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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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아ㆍ이불ㆍ프란시스 알리스 등 6인 그룹전
한국일보

‘이터널 나우(영원한 현재)’ 전시에서 구정아 작가가 선보인 증강현실 기술. 구 작가의 전시공간에서 '어큐트 아트'라는 앱을 다운 받아 켜면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얼음이 떠있다. 작가가 던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에 대한 질문이다. 사진은 스마트폰 화면을 캡처한 것. 김지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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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 없이 커다란 사각 얼음이 눈 앞에 둥둥 떠 있다. 맨눈으로 보면 그저 전시실의 공간일 뿐인데. 얼음은 앱(어큐트 아트ㆍAcute art)을 통해 스마트폰에서만 보이는 증강현실(AR)이다. 21일부터 서울 삼청동 PKM갤러리에서 열리는 그룹전 ‘영원한 현재(이터널 나우ㆍEternal Now)’에서 구정아(52) 작가가 선보인 흥미로운 시도다. 작가가 ‘어큐트 아트’와 협업한 증강현실 프로젝트를 옮겨온 것이다. 별관에 차려진 구 작가의 전시실에서만 체험할 수 있다.

작가는 왜 이런 기획을 했을까. 이건 관람객에게 던지는 경계에 관한 질문이다.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는 “현실에 작가가 개입해 또 하나의 현실을 집어 넣는다는 의도”라며 “현실과 비현실, 존재와 비존재의 정의를 뒤집어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야광 페인트를 사용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만 빛을 발하는 작품 ‘일곱 개의 별(Seven Stars)’도 비슷한 맥락이다. 밝으면 존재하는지조차 알 수 없지만, 어두울수록 그림 속 별은 반짝인다.

◇국내외 명성 작가 6인 한 자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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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알리스의 작품 ‘무제’. 컬러 바와 분쟁 지역의 일상을 그린 두 회화 작품을 나란히 배치에 대비했다. PKM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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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작가를 포함해 이불(55), 프란시스 알리스(60), 카데르 아티아(49), 마사 로슬러(73), 히토 슈타이얼(53) 등 이번 전시에 참여한 국내외 6인의 작가는 이런 도발적인 물음을 작품에 담았다. 모두 세계적인 명성의 작가라 이들이 모인 것만으로도 화제가 됐다. 전시는 박 대표와 독일 나겔-드락슬러 갤러리의 사스키아 드락슬러 대표가 공동 기획했다.

이불 작가는 설치 작품 ‘키아스마(염색체ㆍChiasma)’에서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를 담았다. 키아스마는 염색분체가 X자로 접힌 상태일 때 염색체 간에 유전적 물질의 교환이 일어나는 점을 가리키는 용어다. 세포분열에서 염색체가 교차하는 현상을 통해 인류의 끊임없는 갈등을 유발한 주제인 유토피아 대 디스토피아의 개념을 표현했다는 설명이다.

프란시스 알리스는 화면 조정 시간에 보이는 컬러 바와 아프가니스탄의 분쟁 지역에 머물며 목도한 전쟁 속 일상을 그린 회화를 나란히 배치한 작품들(‘무제’)을 내놨다. 컬러 바의 작품 옆에 총을 잠시 내려놓고 과일을 집어 들어 먹으려는 군인의 모습을 담은 작품을 대비하는 식이다. 박 대표는 “현실과 미디어에서 보이는 괴리에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카데르 아티아는 한옥의 대들보를 사용한 설치 작품 ‘이터널 나우’를 선보인다. 이 그룹전의 명칭도 그의 작품의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카데르 아티아는 지난해 광주비엔날레에서 5ㆍ18광주민주항쟁의 상처가 서린 옛 국군광주병원에 한옥 철거 현장에서 수집한 대들보와 서까래를 세운 동명의 작품을 출품한 바 있다. 갈라진 나무 틈에 스테이플 심을 고정해 봉합하면서 상처와 치유를 표현했다.

◇전쟁의 고통, 일상과 분리될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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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나우(영원한 현재)' 그룹전을 공동 기획한 박경미 PKM갤러리 대표(오른쪽)와 사스키아 드락슬러 독일 나겔-드락슬러 갤러리 대표가 마사 로슬러의 작품 앞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다. 고영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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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사 로슬러는 독특한 포토몽타주 시리즈를 내놨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사진에 포즈를 취하고 있는 패션 모델들과 인테리어 잡지 사진을 병치하는 형식이다. 전쟁의 희생자들이 말끔한 거실에 나타나거나 패션 모델들이 교전 지역을 가로질러 걸어간다. 박 대표는 “분쟁 지역에서 일어나는 죽음이나 강탈이 가정에서의 편안한 삶과 분리될 수 없음을 표현한다”고 설명했다. 그런데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우리에게 던지는 또 하나의 질문인 셈이다.

히토 슈타이얼의 미디어 아트 작품은 여러 개의 LED패널을 붙인 형태다. 그가 이번 그룹전에 출품한 ‘파워 플랜트(Power Plants)’는 ‘그 어떤 디지털 기술도 힘(power)이 필수다’라는 전제에서 출발했다. 전류, 식물에 내재된 생태적인 힘, 또는 현실 속 복잡한 권력의 네트워크 같은 파워의 다양한 의미를 나타낸다.

이 전시는 한국과 독일 갤러리의 합작이라는 의미도 있다. 드락슬러 대표는 “6인의 작가가 모두 다른 배경을 지녔지만, 미술이라는 언어로 세계와 사회의 문제를 건드리기에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며 “6인 중 4인의 여성 작가가 모두 페미니즘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대표도 “사회비판적이면서도 진지한 자세로 작품을 하는 아티스트 그룹 중에서도 탑티어(일류) 작가들만 모았다”며 “현대 사회가 주는 압박감으로부터 어떻게 치유와 해방의 태도를 가질 수 있을지를 6인의 작가가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내년 1월 5일까지 이어진다.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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