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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쉼표토크] 양희은과 여행 ‘멀리 떠나면…내가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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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업에 노래, 소녀가장 노릇 8년여

가수 좀 해보려니 ‘금지곡’ 족쇄

배낭 하나 메고 유럽으로 미국으로

돈 아끼려 밤차 타며 14개월 쏘다녀

30년도 더 지나 ‘배낭여행’ 노래로

38년 만에 다시 찾아간 포르투갈

아흔살 노모 두고 와 가슴 아팠죠

돌아오니 ‘엄마가 딸에게’ 책 나와

이 세상 모든 딸들에게 전하고 싶어

“엄마 젊으실 때 함께 많이 다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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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오늘은 어떤가요? 몸과 마음의 지침을 당연하다 여기지는 않나요? ‘월간 쉼표토크’는 매달 첫주 월요일, 저마다의 방식으로 휴식과 위로를 찾는 문화예술인들을 소개합니다. 화려한 모습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이 누리는 평범한 행복을 찾기 위해 노력하는 그들을 보면서 스스로에게 귀 기울여 보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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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1년, 29살의 가수 양희은은 배낭 하나만 메고 떠났다. 스페인, 포르투갈, 스위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을 돌고는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때는 외국여행이 자유화되기 이전이라 여권 나오는 것도 신기한 시절이었어요. 어렵게 나온 김에 세상을 최대한 많이 보고 가자 했던 거죠. 결국 14개월 만에 귀국했어요.” 지난 26일 서울 합정동의 한 음악 스튜디오에서 만난 양희은이 말했다.

남들 눈에는 ‘상팔자’로 비칠 법도 하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지금이야 한국 대중문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얼마 전 은관문화훈장까지 받았지만, 1970년 스물도 채 안 된 나이에 노래를 시작한 건 오롯이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대학에 간 뒤에도 그는 몰락한 집안의 빚을 갚기 위해 서울 명동 라이브카페 등에서 노래해야 했다. “아침 일찍 학교 갔다가 방송국 가서 라디오 디제이 하고 밤에는 명동 가서 일하는 게 일상이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휴학도 하고, 나중에는 자퇴까지 했다가 재입학을 했어요. 결국 8년 만에 학교를 졸업하면서 빚도 다 갚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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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년 홀가분한 마음으로 앨범을 발표했다. 김민기가 만든 ‘늙은 군인의 노래’와 ‘상록수’가 수록된 앨범이었다. 이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해보려 했으나, ‘늙은 군인의 노래’가 금지곡이 되는 바람에 손발이 묶이고 말았다. 양희은이 방송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걸 본 당시 국방부 장관이 “군인 사기를 저하시킨다”며 금지곡 지정 요청을 한 것이다. “이제 좀 풀리려나 하는 시점에 그렇게 턱 막히고 나니 희망이 사라졌어요. 답답한 마음에 ‘어디 넓은 세계로 나가보자’ 하고 무작정 떠난 거죠.” 그의 첫 외국여행은 희망 없는 세상의 탈출구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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쉼표를 생각하고 떠났지만 외로움과 쓸쓸함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돈이 없으니 숙박비를 아끼려고 밤 기차를 타고 이동했어요. 캄캄한 차창에 거울처럼 비친 내 모습을 한참 들여다봤어요. 그러면 얼마 안 된 나이에도 지나온 삶을 돌아보게 되더라고요. 데이트 한번 못 해보고 일구덩이에 묻혀 지낸 20대 시절을 곱씹으며 스스로를 성찰한 거죠.” 낯선 곳에서 만난 친구가 큰 힘이 돼주었다. 기차 앞자리에 앉은 캐나다의 또래 여성과 친해져 한동안 함께 여행을 다녔다. “스페인을 횡단하는 기차 안에서 무료함을 달래려고 둘이 함께 비틀스, 피터 폴 앤 메리, 밥 딜런 등 팝송을 엄청 불렀어요.”

당시 기억을 담아 만든 노래가 2014년 윤종신과 함께 작업한 ‘배낭여행’이다. 다른 음악가와 협업해 발표하는 싱글 프로젝트 ‘뜻밖의 만남’의 첫번째 곡이었다. “배낭 하나 짊어지고 길 떠나고만 싶어/ 바람 따라 구름 따라 거칠 것 하나 없이/ 같이 떠날 누군가 있으면 참 좋겠어/ 외로울 때 혼자 부를 노래가/ 마음에 한가득 남아 있으면 좋아/ 제자리에 머물면서 왜 알 수 없는 걸까/ 멀리멀리 떠나야만 왜 내가 잘 보일까.” 그가 쓴 노랫말이다.

14개월간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1982년 여름이었다. 병원에 갔다가 난소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 3개월 시한부라 했다. ‘이제 좀 살아보려는데 어떻게 이런 일만 닥치나.’ 수술을 받은 뒤 이를 악물고 버텼다. 3개월을 넘기고도 살아남았다. 방송국에서 연락이 왔다. “살았으니 이제 일하러 나와” 했다. 라디오 디제이 일을 다시 시작했다. 이후 라디오 디제이는 그의 평생 직업이 됐다.

“그때는 주중이고 주말이고 무조건 생방송이었어요. 콘서트를 하면서도 라디오는 무조건 생방을 했죠. 연예인끼리 만나서 얘기해보면 다들 그렇게 여행을 가고 싶어 해요. 늘 생방송을 하고, 섭외가 오면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돼 있어야 하기 때문에 내 시간이 진짜 내 시간이 아닌 거죠. 떠날 수 없기에 늘 떠남을 바라는 게 우리 연예인들의 삶이거든요. 저는 너무 여행이 가고 싶으면 친구가 사는 일본에 당일치기로 다녀오곤 했어요. 아침 비행기로 가서 종일 걷고 맛있는 거 먹고 밤 비행기로 돌아오는 거죠. 그렇게 하루만 다녀와도 다들 저를 부러워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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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씩 며칠 짬이 나면 패키지 여행을 가기도 한다. “가까운 중국에 29만9천원짜리 패키지로 가도 재밌더라고요. 젊은 여자들이 친구끼리 오거나 하면 거기 껴서 같이 어울리는 거죠. 제가 막 재래시장으로 끌고 다니기도 하고요. 보통사람들 틈에 껴서 그들 일상의 얘기를 듣는 게 재밌어요. 연예인들이 세상에 대해 알 길이 별로 없는데, 그렇게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그게 또 좋더라고요. 어느 부부의 따뜻한 모습을 보는 것도 감동이고.”

최근에는 남편과 함께 포르투갈로 9박10일의 긴 여행을 다녀왔다. 올해 <문화방송>(MBC) 라디오 프로그램 <여성시대> 진행 20년을 맞아 특별휴가를 받았기에 가능했다. 38년 전 배낭여행 때 그는 포르투갈의 묵묵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참 좋아했다. 이번에 다시 찾은 포르투갈은 파란 하늘이 특히 아름다웠다. “다른 나라에 가보면 문화, 풍습 이런 거보다도 원초적인 하늘, 나무, 바람 이런 것들이 참 부러워요. 눈이 시리도록 새파란 하늘, 거칠 것 하나 없는 공기, 바람에 실린 숲의 냄새 같은 걸로 힐링을 하고 에너지를 얻어요.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하늘과 공기가 이렇게 됐는지 안타까울 따름이죠.”

여행 가서 좋은 풍경 보고 맛있는 거 먹을 때면 엄마 생각이 난다고 그는 말했다. 이번 포르투갈 여행에서도 그랬다. 그는 아흔살 노모를 모시고 산다. 2016년 엄마와 일본 여행을 함께 갔다. “저기 벚꽃이 예쁘게 피어 있어서 ‘엄마, 우리 가서 꽃 보고 오자’ 했더니 ‘나 여기 있을 테니 너 혼자 보고 와’ 하시더라고요. 엄마가 걸음이 그렇게 느린지 미처 몰랐어요. 늘 집에만 있다가 밖에 나와서야 그걸 안 거죠. 너무 가슴이 아팠어요.” 여행을 마치고 공항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엄마는 심장발작을 일으켰다. 병원으로 실려가 2주간 누워 있어야 했다. 그게 엄마와의 마지막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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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여행에서 돌아오니 <엄마가 딸에게> 책이 갓 출간돼 있었다. 양희은과 김창기가 ‘뜻밖의 만남’ 네번째 프로젝트로 함께 만든 곡 ‘엄마가 딸에게’(2015)의 가사를 토대로 만든 그림책이다. 김창기는 애초에 아빠가 아들에게 들려주는 노래로 만들었다. 이를 양희은이 부르게 되면서 아빠를 엄마로, 아들을 딸로 바꿨다. 여기에 양희은은 딸이 엄마에게 하는 말을 2절 가사로 지어 붙였다. 2016년 <에스비에스>(SBS) 음악 예능 <판타스틱 듀오>에서 양희은과 악동뮤지션이 함께 이 노래를 불러 시청자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했다. 양희은은 “이 노래와 책을 통해 엄마는 딸에게, 딸은 엄마에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솔직하게 전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나타냈다.

“엄마가 더 젊었을 때 함께 여행을 많이 다니지 못한 게 너무 한이 돼요. 제가 이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은 엄마와 여행을 많이 다니라는 거예요. 꼭 외국에 나갈 필요도 없어요. 엄마가 잘 다니던 시장, 엄마가 어릴 적 살던 동네…. 엄마랑 함께 목욕탕 가는 것도 좋아요. 엄마와 여행 가면 보는 것마다 이거 예쁘다, 저거 예쁘다 수다가 늘어요. 남편하고 여행 가면 그런 재미가 없죠. 엄마가 건강하실 때 여행 많이 다니세요. 그게 진정한 인생의 쉼표랍니다.”

서정민 기자 westmi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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