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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4 (월)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갑질이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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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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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영업이야-55] 위키백과에 따르면 갑질은 '계약 권리상 상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자가 우월한 신분, 지위, 직급, 위치 등을 이용하여 상대방에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이래라저래라 하며 제멋대로 구는 행동'을 말한다. 갑질 범위에는 육체적·정신적 폭력, 언어 폭력, 괴롭히는 환경 조장 등이 해당된다. 대한항공의 땅콩 회항 사건처럼 기업 대표나 경영진 일가의 인물들이 직원들을 마구 함부로 대하는 오너형, 남양유업 본사 직원이 대리점 사장에게 밀어내기를 강요한 밀어내기형, 취업이 어려운 이들의 사정을 악용해 무급이나 최저시급 이하의 급여를 주는 열정페이형 등 갑질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대부분 상황에서 '을'인 영업사원은 고객에게 갑질을 많이 당한다. 내가 8년간 근무했던 의료 분야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제약이나 의료기기 영업은 의사 처방에 따라 매출이 크게 달라지는 속성 때문에 갑을 관계가 가장 심한 영역 중 하나로 꼽힌다.

의사들 등산모임이나 체육대회가 열리면 제약회사 직원들이 도시락과 행사용품을 준비한다. 그들이 고기도 굽고 플래카드도 준비하고 노래와 춤으로 분위기도 띄운다. 취기가 오른 의사들을 집까지 데려다 주는 것도 영업사원들 몫이다. 의사들이 외국에 가게 되면 영업사원이 의사 자택에서 픽업해 인천공항까지 데리고 간다. 지방 학회에 참석할라치면 자택부터 행사장까지 왕복으로 데리고 다닌다. 어떤 의사들은 숙소와 식사, 골프 비용까지 요구하기도 한다.

학회 부스를 보면 학회 참여자보다 부스에 서 있는 영업사원 수가 더 많을 때도 부지기수다. 사실상 광고로서 효과는 없지만 부스에 나가지 않으면 의사들에게 찍히기 때문에 보험 들었다 셈 치고 나간다. 문제는 의사들이 부스비를 더 많이 받아내기 위해 국제 행사를 만든다는 점이다. 국내 행사는 부스비가 몇백만 원에 불과하지만 국제 행사는 부스 1곳 비용만 몇억 원이 되기도 한다. 그로 인해 학술적으로 큰 가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의학 관련 행사는 초호화판이다. 대개 특급호텔의 가장 큰 볼룸을 잡아놓고 행사를 진행한다. 여타 학문 분야 학회 행사와 비교해 보면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일반 학회는 대개 대학교 강의실 몇 군데를 빌려서 진행한다.

제약 영업사원에게 개인적인 목적의 식사 자리에 대한 비용 결제를 요청하는 것도 매우 흔한 일이다. 동문 의사 몇몇 모임에 지원을 요청하기도 하고, 가족 전체가 나와 밥을 먹는데 영업사원이 결제를 해주기도 한다. "나 외국 가 있는 동안 우리 집 개 밥 좀 매일 챙겨줘"라는 말에 영업사원들은 놀라지 않는다. 누군가는 의사의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의사 자녀의 숙제를 대신하고 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의사들은 이에 대해 불만이 많다. 많은 의사들은 본인이 요구한 것이 아니라 영업사원들이 알아서 한 것이라고 항변한다. 또는 영업사원과 친해서 벌어진 일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의사 대신 예비군 훈련을 갔다가 적발된 영업사원은 본인의 자발적 행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럴 수도 있다. 본인 영업실적을 위해, 의사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렇게 했을 수도 있다. 법원에서 영업사원은 집행유예를 받았고, 의사는 벌금형에 머물렀다. 하지만 그 의사는 과연 본인의 미필적 고의를 어디 가서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학회 부스비 지원은 업계 관행이라고 말한다. 업계가 학회를 지원함으로써 한국 의학계가 발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국제 행사로 인한 부스비 폭등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이 없다. 의료기기협회 차원에서 건의를 해보았지만 의사들은 묵묵부답, 요지부동이다. 한번 올라간 부스비는 절대 내려오지 않는다. 그리고 국제 행사는 매년 계속해서 늘어난다.

일부 의사들은 적정선을 넘어도 그에 대한 문제의식이 없다. 이유는 레지던트나 인턴 시절부터 선배 의사들이 갑질을 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의사들이 호통치면 이유를 불문하고 영업사원들이 죄송하다고 머리를 조아리는 모습을 보며 레지던트들은 선배 의사를 닮아간다. 제약회사 직원들이 세미나를 위해 음식물을 준비해 와도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고, 사적인 부탁을 하기 시작한다. 새롭게 탄생하는 20·30대 젊은 꼰대는 여성도 예외가 아니다.

영업사원을 미천한 존재로 보다 보니 여성 영업사원을 대상으로 한 성희롱·성추행 사건도 빈번하다. 술시중을 들게 하고, 술에 취해 여성 영업사원 차량의 조수석에 올라타고, 호텔 숙소로 쫓아오고, 장난이라며 목과 귀, 옆구리를 만지거나 꼬집는다. 얼굴이 마음에 드니 너희 제품을 쓰겠다고, 얼굴이 마음에 안 드니 앞으로 찾아오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여럿이 있는 식사 자리에서 식탁 아래로 발을 뻗어 치마를 입은 여성 영업사원 다리를 계속 비볐다는 의사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급기야 올해 7월에는 여성 영업사원의 성접대 사실을 자랑한 공중보건의의 글이 언론에 공개되기도 했다.

사실 이런 갑질 문화의 형성에는 예전 선배 영업사원들의 무기력한 대응 탓도 크다. 인권이나 양성 평등에 대한 개념이 없던 시절에 고객을 왕처럼 모시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만이 영업전략이었다. 늦은 저녁 시간에 잔뜩 취한 의사에게서 걸려오는 전화를 여전히도 본인의 경쟁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사고가 터지면 이유를 불문하고 무조건 고객이 옳다고 말하는 임원들도 있다. 몇 년 전 술에 취한 제약사 영업사원이 전공의를 폭행한 일이 있었다. 지극히 사적인 다툼이었지만 의사들의 조직적인 불매 움직임이 감지되고 의사협회장이 SNS에 공개적으로 사건을 거론하면서 해당 기업은 몸이 달았다. 결국 민사상으로 합의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업사원은 사직했고 해당 기업 대표이사는 의사협회장에게 공개사과를 해야만 했다.

이 사례는 일부다. 대부분의 선량한 의사들은 억울해할지도 모른다. 사실 어디든 소수가 문제다. 또 이 이야기의 상당수는 과거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EBS 명의 프로그램에 나온 유명한 시니어 의사부터 갓 의대를 졸업한 인턴까지, 다른 영역에서는 보기 힘든 장면을 의료 분야에서는 많이 보았다. 언론에 공개되면 포털 1위에 오를 법한 놀라운 일들이 의료 분야에서는 관행이라는 이유로 유야무야 넘어가는 경험을 많이 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갑질하지 말라는 조항이 없어서 그런가. 의사들과 영업사원 모두 대오각성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김진환 벤처기업 세일즈 디렉터]

※10년 이상 세일즈·마케팅 업무에 종사했으며 현재 암호화폐 지갑을 서비스하는 벤처기업에서 세일즈 디렉터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영업에 대한 사회적 편견을 불식시키고 그 전문성을 알리고자 합니다. verhoyansk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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