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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27 (목)

[원유헌의 전원일기](8)도장깨기식 마을 김장…“다 했대?” “한참 남았는디 워째야 쓰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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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저 vs 김치통

경향신문

마을 아낙네들이 임시 김장터로 마련된 구 이장님댁 창고에서 절인 배추에 김칫소를 넣고 있다. 초겨울 추위가 괴롭지만 손은 연신 움직이고 대화는 끊이지 않는다. ⓒ 원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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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이장님댁 김장 날, 둘러앉은 어머니들은 마스크에 비닐캡까지 쓰고 손은 배추 마사지 중

김장 막바지 “이녁 집에 가져갈 거 담아잉?”…김치 세 포기씩 담긴 봉지를 나눈다

그랜저 타는 성공은 내게 어렵겠지만 아쉬울 것 없다, 돌려줘야 할 김치통이 5개나 되는 인생이니


“자네 온다고 했는가? 벌써 시작했는데.”

내 이럴 줄 알았다. 전날 약속한 시간은 분명히 오전 10시였고, 일찌감치 나서려고 바지에 한쪽 다리만 끼운 채 전화 받은 시간은 9시였다. 9시20분에 도착했지만 나는 그냥 ‘늦는 놈’이 된다. 왜 우리 마을은 베이징 시간으로 사시는지 모르겠다. 꾸짖는 분은 없지만 죄송스러운 쪽 마음은 굳은살이 박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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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이장님댁 사모님인 오봉댁 어머니가 필자의 아내에게 나락에 대해 한 수 가르쳐 주고 있다. ⓒ 원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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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舊) 이장님댁 김장하는 날이다. 한 번도 제대로 도와드린 적이 없었고 김치는 매년 제대로 된 통으로 받았다. 이번에는 꼭 가겠노라 벼르다가 마침 그 댁 큰누님이 사진도 좀 찍어주면 좋겠다고 부탁해서 시간 약속까지 단단히 했다. 그러고는 없지 않아 억울하게 늦었다.

김장용 깔개에 둘러앉은 동네 어머니들은 나를 보고 눈을 작게 뜨셨다. 손은 배추 마사지로 바빴고 대부분 마스크를 한 탓에 표정은 눈에만 있었다. 반기는 표시였다. 머리에 비닐캡을 쓴 분도 많아서인지 심리적인 위생기준은 거의 해썹(HACCP) 수준이다.

“원샌 오셨소?”

“깨꼬롬허요(웬일로 깔끔하네요).”

수줍었다.

“세수만 했을 뿐인데요….”

좀 덜 생긴 것들의 장점은 볼수록 느낌이 악화되진 않는다는 점이다. 혹자는 나보고 점점 깔끔해진다고 하기도 한다. 늦가을 수확의 깊은 피로와 초겨울 낮은 해의 역광이 언뜻 겹칠 때 나타나는 착시현상이다. 세수를 제대로 하거나 면도를 신경 써서 한 날 그런 반응을 접할 때가 있고, 두 가지가 겹친 날은 내가 봐도 간혹 괜찮다. 그걸 알아보신 거다.

마을의 김장은 도장깨기식으로 진행된다. 날짜와 시간이 겹치지 않도록 각 집의 D-day를 사전 조율한 뒤 10명 정도의 어머니들이 하루에 2건 정도씩 해치우는 방식이다. 이날도 앞서 한 집 김장을 마치고 350포기짜리 2차전을 치르는 중이었다. 깔끔하게 치워진 창고에서 가족을 포함해 20명 정도가 체계적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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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이용하는 정미소 내부 모습이다. 구례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곳이다. ⓒ 원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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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예. 갖구 가요!”

“막둥아!”

“다 펐어요!”

문장에 주어나 목적어가 없어도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틈틈이 깔깔거리는 호흡 소리와 허리 통증을 호소하는 감탄사만으로 하나의 세상이 돌아간다.

“다 했대?”

막바지를 직감한 날몰댁이 물으니 호스트인 오봉댁이 볼이 닿을 듯 다가와 속삭이듯 정색했다.

“한참 남았는디 워째야 쓰까이.”

“아 많으믄 좋제!”

또 깔깔 깔깔. 이유는 없다. 그냥 코드가 맞는 거다.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웃었다는 1970년대 여고생들 같아 귀엽기까지 하다.

사실 웃으면 행복해진다고들 하는데 말이 안된다. 호 하면 아프고 트림하면 배부르던가? 힘들면 한숨도 쉬고 엄살도 떨어야 위로도 받고 관심도 준다. 하지만 웃음이 통증을 줄여준다는 건 맞는 말인 듯하다. 뼈마디가 다 닳아 없어진 어머니들이 웃을 때만큼은 굽었던 허리가 펴지는 모습을 자주 봤다.

김장은 두 시간이 채 안돼서 끝났다. 큰형님이 주문한 짜장면과 잡채로 뒤풀이를 마친 어머니들은 묵직한 비닐봉지를 하나씩 들고 귀가하셨다. 오봉댁은 막판에 “이녁 집에 가져갈 거 담아잉?” 하시며 김칫소에 참깨를 잔뜩 뿌리셨고, 그날의 가장 고소한 김치 세 포기씩이 봉지에 담겨 흩어졌다.

구 이장님 내외분과 가족들이 창고 앞에 둘러앉아 남은 음식을 앞에 놓고 빠져나간 기운을 추슬렀다. 어르신들은 원래 걸음도 힘겨워하시니 힘들었고, 아들 며느리들은 힘들지 않은 척하느라 힘들었다. 손주들도 잔심부름, 술심부름에 두터운 입김을 쏟았다. 그래도 누구 하나 엄살 없이 임무를 완수했고 표정은 뿌듯했다.

“양념에는 원래 무채를 안 썼어요?”

궁금했던 걸 여쭤봤다. 서울·경기 지역에선 무채를 써는 게 김장의 주요 작업인데 남부지방에서는 김치에서 무의 흔적을 찾기 어려웠다.

“치적치적하다고 안 써. 다 갈아 옇지.”

곤죽상태인 시뻘건 양념의 내용이 궁금했다. 우리집도 몇 해 전 김장을 한 적이 있지만 김칫소를 얻어서 한 거라 반쪽 김장이었다. 그때 김장의 방향은 돼지고기와 굴을 향해 있었고 성공적이었다고 기억한다.

“마늘 생강 청각 멸채젓, 젓은 액젓도 쓰고 갈아서도 옇고.”

오봉댁 어머니는 중간중간 아버님과 가족의 도움을 받아가며 복기하셨다.

“디포리(밴댕이 새끼 혹은 보리멸) 다시마 버섯 양파 국멸치로 육수 내고. 그 덕에 조미료 안 써.”

말씀하시던 어머니가 잠깐 호흡을 고르는 틈을 노려 막내 며느리가 치고 들어왔다.

“배 사과 무 갓 대파 쪽파 미나리 참깨….”

어머니가 다시 키를 잡으셨다.

“무는 갈아 옇고 갓은 곱게 썰어 여. 그전엔 밤도 썰었어. 한 스무 가지 들어가까?”

이 많은 걸 준비하시는 데 얼마나 걸렸을까.

“옛날엔 식구가 많응께 일주일이면 다 했는디 인자는 두 배는 걸려. 아버지가 올해는 파를 다 까줬구마. 노느니 멸치 똥 깐 거루 치면 한 달 걸렸으까?”

“한 달이 머여. 배추 심은 지가 은젠디.”

모름지기 김장의 대장은 어머니다. 연중 농사와 행사를 통틀어 진두지휘의 기운을 놓지 않던 아버님도 잠시 구석에서 조연에 만족해야 하는 일이 김장이다. 그래도 대화 중에 당신 역할이 언급되자 발언권을 얻은 듯 말씀하셨다.

“돈이 얼마가 드는지도 몰라. 세도 못해. 계산허다 말아부렀네. 옛날부터 김장 허고 초가 지붕 날개 엮어서 얹으믄 안심한다고 했응께 맴이 좋은 거지. 그나아이나(그나저나) 쌀은 다 팔았고?”

맞다. 쌀을 좀 갖다 드린다는 걸 까먹고 있었다. 올해 새로 심은 나락 종자가 찰기 성분이 많아 어르신들 드시기에 좋을 것 같았다. 간전댁 할머니랑 구 이장님께는 맛을 보여 드리려 했는데 도리를 놓치고 살았다.

말씀대로 금년 쌀은 다 팔렸다. 예년과 다르게 쌀 판매를 회원제 방식으로 시도해 보기로 했다. 작년까지는 “쌀 팔아요~” 소리 지르고 한 번에 주문이 끝나면 손 털고 그만이었다.

소비자 입장에선 일 년에 한 번 20㎏ 사먹고 나면 다른 쌀을 찾아야 했다. 그래도 주식(主食)인데, 안정적으로 먹고 싶다는 요청이 있었다.

1년에 쌀 80㎏을 여덟 번에 나눠서 도정하고 보내주겠다고 했다. 두 가지 품종 모두 회원 모집을 마쳤고 회원제 분량 외에도 다 팔았다. 모처럼 통장을 자주 보고 싶었고 마음도 두둑해졌다. 예전에 추곡수매를 하는 곳에 가보면 작은 마을에도 당일에만 풀리는 현찰이 억대였고 그날 읍내에는 젖과 꿀이 넘쳤다고 들었다. 내 맘도 잠시 그러했다.

월급쟁이 연말 통장처럼 숫자들이 기어 나갔다. 택배비를 시작으로 빌린 논의 임차료, 봄에 못 준 기계 대금, 거름 되라고 논에 심은 풀씨와 땅 가느라고 부탁한 트랙터 작업비용까지 그 위험하다는 이안류를 체감했다.

콤바인 52만5000원

건조비 24만0000원

합 76만5000원

농협 352 0343 **** ** 임**

75만원만 넣어주세요

방금 메시지가 도착했다. 마지막 문장의 넓은 아량에 감읍하며 즉시 이체를 마쳤다. 두둑하던 마음은 반쪽이 됐다. 흐뭇한 숫자의 길이는 딱 보름간 유지됐다. 다이얼처럼 돌려 끈을 조이는 명품 작업화를 사고 싶다는 생각도 거기까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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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마을 친구가 구례에서 제일 큰 정미소에서 도정한 쌀을 트럭에 싣고 있다. ⓒ 원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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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아는 공무원인데 면사무소에 와서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단다. 그분은 요행히 나를 아는 직원을 만나 통화가 연결됐고, 귀농을 계획 중인데 만나자고 했다. 말려야겠다는 생각에 그러자고 했다. 길지 않은 대면에서 그분은 강한 의지를 드러냈고, 그럴수록 천천히 생각하시길 부탁드렸다.

그리고 며칠 후 다시 전화가 왔다.

“아내와 함께 구례로 가는 중입니다. 잠시 뵐 수 있을까요?”

자동차 매장에서도 남자가 혼자 들어오는 경우 구매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판단해서 성능과 장비 기능을 건조하게 설명한다. 한 번 왔던 남자가 부인을 대동하고 왔을 때, 그때 혼신을 다해서 극진히 모시면 성사될 확률이 높다고 했다. 나도 그 점을 감안했다.

“사모님이 원하시는 지역을 천천히 찾으세요. 저도 전국을 돌았어요. 마음에 드시는 곳은 아침저녁으로 살피시고 계절도 달리해서 가 보시고요.”

부인은 웬만하면 긍정의 리액션을 반복하더니 대화 내용이 지루했는지 갑작스레 품평을 했다.

“이런 일 하실 분 같지 않은데요.”

세상에나. 여기서 ‘이런 일’은 농사를 의미하고 ‘같지 않은 분’은 나를 가리킨다. 처음 들어보는 말이다. 게다가 화자(話者)는 도시인이었다. 남편분도 거들었다.

“네. 맞아요. 저번에 뵀을 때보다 훨씬 젊어 보이시네요.”

오늘도 세수와 면도가 겹친 날이긴 하다.

“혹시 제가 구례로 내려오게 되면 멘토 역할을 부탁드려도 될지요.”

이분들은 도움이 필요했고 그 도움을 내가 줄 수 있으리라 기대하시는 듯했다. 아직은 그럴 형편이 못 된다고, 나중에 어려움이 있으면 나누겠다고 정중히 고사했다. 그럼에도 절실한 마음에 감각을 거스르는 말을 의지로 하는 듯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장씨 아저씨였다.

“아 김치 가져가라니까! 시간 되면 애기 엄마랑 와서 저녁 먹고.”

키웠던 통화 볼륨에 내용이 들렸나 보다. 부인이 말했다.

“내려와서 성공하신 것 같아요.”

말씀이 과했다. 근근이 살아가는 중인데.

성공은 없다. 사방팔방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생인데 방향과 지점을 정해 놓고 성과를 판단하는 성공이라면 관심 없다. 굳이 말하자면 아직 실패는 아니다. 실패가 끝은 아니니 겁먹을 것도 없다. 그랜저 타는 성공은 어렵겠지만 그렇게 아쉽진 않다. 나한테는 돌려줘야 할 김치통이 5개나 된다. 겁이 없는 이유다. 그럼 됐지 뭐.

▶필자 원유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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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생. 44년간 서울에서 살다가 2011년 연고가 전혀 없는 전남 구례로 내려가 농부입네 살고 있다. 농사만으로는 먹고살기 힘들어 각종 아르바이트로 현찰을 보충하며 연명한다. 2018년 <힘들어도 괴롭진 않아>(르네상스)라는 책을 만들기도 했으나 8년째 나아진 건 없다. 웬만하면 그러려니 하며 산다.


원유헌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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