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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2 (목)

[어디있니?] 흔적 찾은 8개월…'희망·죄책감·환희'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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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호 정훈군…46년간 우편물·기사·탄원서 못버린 엄마

40여년 만에 모녀 상봉…말 잇지 못한 채 "미안하다"

뉴스1

실종아동찾기 캠페인 '엄마는 울고 있다' ©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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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1) 김민성 기자 = 지난 4월5일 민영통신사 뉴스1은 창립 8주년을 맞아 실종아동찾기 캠페인 '엄마는 울고 있다'의 첫 게시를 알렸다. 이후 본지에서 제공되는 모든 기사에 장기실종아동의 사진, 이름, 실종 당시 나이 등 인적사항을 담아 일종의 '경보' 형태로 공개해 왔다.

경찰청이 주관한 사전지문등록제를 통해 실종아동을 찾은 사례와 실종되고 수십년이 지나고도 아이를 애타게 찾고 있는 가족의 사례 등 총 20여건이 본지에 실렸다.

본지가 직접 만난 실종아동들의 부모들은 실종된 자식을 애타게 기다리다 암(癌) 선고를 받거나, 마음의 병이 생겨 우울증을 앓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경찰, 지상파 방송의 실종아동찾기 등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고도 자식의 생사조차 확인을 못한 탓이다.

대부분 부모들은 어릴적 사진을 매만지며 "어디서든 아프지 않고 잘 있으면 만날 수 있을 것"이란 믿음으로 희망을 품고 본지에 실종 당시 상황을 알려왔다.

◇탄원서·전단지 모두 간직한 母…11년간 아들 기다리다 암 선고받은 父

첫 기사는 1973년 3월18일 서울 서대문구 대현동에서 사라진 이정훈군(현재 49세) 사례다. 실종자 정훈씨의 모친 전길자씨(72)는 이젠 고층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서 옛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그 골목길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전씨는 본지와 인터뷰에서 "젖 주니까 자더라고. 눕혀 놓고 세수하려고 나왔는데 가슴이 막 두근거려요. '왜 이러지'하고 문 열고 정훈이를 부르니까, 애들이 셋인데 정훈이만 없었어요.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모른대"라며 눈물을 훔쳤다.

전씨가 생후 100일 된 둘째 아들에게 젖을 먹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간 사이 벌어진 일이었다. 전씨가 집에 간 동안 아들을 잠시 봐 주기로 한 슈퍼 주인 아주머니도, 아들과 함께 놀던 아이들도, 그 누구도 아들의 행방을 몰랐다.

전씨는 이후 46년 동안 Δ아들의 실종 사건을 담당한 형사로부터 받은 우편물부터 사건을 보도한 첫 기사 Δ탄원서 한 장 Δ실종자 찾기 전단지 Δ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한 장까지 모든 자료를 파일 하나로 정리해 소중히 간직해 왔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에서 시간의 흐름이 묻어났지만 보관 상태만은 정갈하고 깨끗해 취재한 기자의 마음을 먹먹하게 하기도 했다.

자식을 잃어버린 죄책감에 암 선고를 받는 등 고통을 겪는 부모도 있었다. 지난 1987년 여름, 부산 해운대 바닷가로 놀러 간 아들 홍봉수군(당시 4세·현재 만 35세)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11년을 아들만 그리다 세상을 떠났다. 남편의 빈자리를 짊어진 엄마 오승민씨(65)는 그렇게 홀로 21년 동안 아들은 기다렸다.

"잠깐 바닷가 다녀온다고 했거든요. 그게 30년이 넘었네요"라는 말로 입을 뗀 오씨는 여전히 봉수군의 마지막 모습을 또렷하게 기억했다. 사촌 형·누나들과 바닷가에 놀러 가고 싶다고 한 뒤 쉴 새 없이 밀려들어오는 피서객을 상대하던 오씨는 본체만체 봉수군에게 "다녀오라"고만 한 게 마지막 모습이다.

32년이 흘렀지만 오씨는 아들의 손끝 하나까지 선명하게 기억했다. 오씨는 "손가락 10개가 동글동글하고 봉숭아 물이 들어 있었다"며 "당시 유행했던 황금색 수영복에 하늘색 운동화를 신고 바다로 갔다"고 말했다.

약 15년 전 봉수군을 찾을 수 있던 기회가 한 번 있었지만 허망하게 사라졌다. 오씨는 "2004년 실종아동법이 통과된 기념으로 경찰, 법무부, 보건복지부가 장기실종아동 납치범 자진 신고 행사를 준비했다"며 "자신 신고를 한 사람에게는 면죄부를 주는 조건이어서 큰 기대를 걸었지만, 고(故)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 터지면서 행사가 묻혔다"고 말끝을 흐렸다.

뉴스1

한태순 씨가 18일 오후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에서 실종돼 미국으로 입양을 갔다가 44년 만에 가족을 만나기 위해 귀국한 딸 신경하(미국명 라우리 벤더)씨를 포옹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19.10.18/뉴스1 © News1 안은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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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년 만에 상봉 "사는 게 힘들어 가족 찾을 생각도 못했어"

대부분 안타까운 사연이 이어졌지만, 수십년이 지나 감격스러운 상봉을 맺은 가족들도 있었다. 장기실종자 분류됐었던 서경희씨(49·여)가 40여년 만에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의 품에 안긴 사례를 뉴스1이 가장 먼저 소식을 전했다. "사는 게 너무 힘들어 가족들을 찾을 생각을 못 했다"는 경희씨의 말에 가족은 원망과 함께 죄스러운 마음에 눈물만 흘렸다.

나이가 들고 철이 들어서도 경희씨는 부모를 찾을 엄두가 안 났다고 했다. 하루하루 먹고사느라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몰랐고 어른이 되고 보니 돈도 벌고 성공을 해야지 부모를 찾아갈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이제 딸을 만났으니 같이 하고 싶은 것이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모친 이연자씨(74)는 "딸을 찾은 것만으로도 더는 바라는 게 없다"고 했다. 동생인 경선씨는 "언니랑 해 보고 싶은 게 너무나도 많다"고 말하곤 경희씨의 얼굴을 바라보며 웃었다.

지난 10월18일 경기 안양시에 거주하는 한태순씨가 장녀 신경하씨(49·미국명 라우리 벤더)씨를 실종 44년 만에 만나게 된 사실은 뉴스1뿐 아니라 타 매체에서도 집중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양부모 밑에서 자라 학교를 졸업한 경하씨는 간호사가 됐고 지금은 인디애나주 인디애나폴리스의 병원에서 근무하고 있다.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뤘고, 딸을 낳았다. 의대를 다니는 딸은 졸업을 앞두고 있다. 경하씨는 진짜 자신의 뿌리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었지만 이름도, 생일도, 주소도 무엇하나 정확히 기억나는 것이 없었다고 한다.

미국 인디애나폴리스와 태순씨가 지금 살고 있는 안양시를 이어준 건 혈육의 흔적인 DNA였다. 4년 전 태순씨는 입양된 한인들의 DNA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해 친부모를 찾아주는 비영리단체 '325캄라'(325kamra)에 대해 알게 됐고 곧바로 DNA를 등록했다. 그리고 최근 경하씨가 DNA를 통해 부모님을 찾아보자는 딸의 권유에 DNA를 등록하게 되면서 44년 만에 만남이 이뤄졌다.

인천공항에서 만난 이들은 꼭 안은 채 제대로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어머니인 한씨는 어느새 중년의 여성이 돼 눈앞에 나타난 딸에게 "아임 쏘리, 아임 소 소리(I'm sorry, I'm so sorry)"라는 짧은 영어로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경하씨를 끌어 안은 태순씨의 손은 한동안 풀리지 않았다. 모녀는 서로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꼭 닮은 얼굴이, 그리고 느껴지는 체온이 서로가 가족임을 증명했다.
ms@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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