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9 (일)

[미디어 세상]작은 만남, 큰 흐름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미국의 개척시대를 배경으로 한 서부극은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이 새로 진입한 이주자에게 영문도 모른 채 학살당하던 문맥이지만 순진한 어릴 적엔 가슴을 조마조마하게 만들어주던 주말의 기다림이었습니다. 쌍권총을 허리춤에 차고 광활한 대지를 말 두마리와 함께 모험하는 주인공은 정의로움의 상징과 같았습니다. 거친 황무지를 지나 이따금 마주치는 마을마다 있는 선술집에는 saloon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영어에 익숙하지 않은 나이라도 살롱이라는 단어는 들어본지라 뭔가 비슷한 것이 아닐까 추측하였습니다.

경향신문

18세기 유럽에서 꽃피웠던 살롱 문화가 지금 한국에 다시 오고 있다는 기사가 최근 미디어에 심심치 않게 보여집니다. 프랑스어에서 유래했다는 살롱의 사전적 정의는 ‘친목이나 지적인 회합을 위한 사람들의 모임’이라 합니다. 취향이 같은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서로의 개인사보다는 공통 관심사에 대해서 토론하는 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주52시간제라는 사회적 합의는 퇴근 후라는 지금껏 찾기 어려운 여유를 사람들에게 허락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집단을 위해서 응당 희생하는 것에서 자신을 돌보는 방향으로 삶에 대한 관점이 바뀌기 시작하며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하고 추구하는 것이 자연스레 떠오르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로 온라인을 기반으로 모집된 후, 오프라인에서 만나 책에 대한 의견을 교환하거나 작은 강연을 듣고 차와 함께 다양한 경험을 나누는 모임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취향’은 같지만 ‘환경’은 다른 사람들이 같은 목적으로 모인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일을 하는 비슷한 생활의 사람들만 모인다면 흥미로운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비법을 배우기 위해 산사의 도량으로 찾아간 제자 후보생이 정식으로 가르침을 얻기까지 물을 긷고 밥을 지으며 스승님의 수발을 드는 수년간의 고행 장면은 우리에게 익숙합니다.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 제자는 하산의 허락을 얻기까지 뼈를 깎는 수련으로 스승님의 무공을 20년에 걸쳐 천천히 다운로드 받습니다. 그 사이에 원수가 사고나 질병으로 사망하면 곤란하기에 적의 장수를 빌어야 했을지도 모릅니다.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누적된 경험으로 형성되어 구전으로 전해지던 비법은 지식백과에서 Q&A 게시판을 거쳐 블로그와 동호회에서 나누어지다 위키피디아에서 집대성되어집니다. 수백년의 농작물 경작 경험이 불과 하루 만에 기계학습을 통해 시뮬레이션되는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의 경험이 누적된 노하우는 그 효용을 상당히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동화와 지능화의 두 축이 결합되며 선배의 경험치를 온전히 배워 성실히 일하던 사람의 역할이 줄어들게 됩니다. 지금껏 정립된 학문과 산업 분야의 효용이 제한적이 되자 다양한 분야의 공부를 모으려 하는 ‘융합’이라는 단어, 그리고 여러 학문 분야들을 연결하여 더 큰 깨달음을 얻고자 하는 ‘통섭’이라는 단어가 낯설지 않게 되었습니다.

인공지능의 기초가 되는 딥러닝 기술의 선구자 중 하나인 테런스 세즈노프스키 박사는 헬름홀츠 클럽(Helmholtz Club)이라는 연구 클럽에서 매월 한 번 만나는 모임을 통해 외부 강연자와 의견을 나누는 데서 시각 피질에 대한 큰 발견을 할 수 있었다고 회고합니다. 그의 연구실 티테이블에서 매일 오후 잡담과 연구를 격의 없이 나누는 티타임에서 다양한 전공을 한 사람들이 생각을 공유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는다 합니다.

한 조직 안의 사람들만이 같은 목적으로 똘똘 뭉쳐 늘 함께하며 동일한 목소리를 내던 시절이 저물어 가고 있습니다. 같은 종 내에서의 복제가 아닌 이종 교합을 통해 얻어진 경쟁력은 변화가 빨라진 세상 속 우수한 적응을 만들어냅니다. 우연한 행운(serendipity) 또한 다양성 속에 얻어지는 선물과 같습니다. 이처럼 거창한 효용이 아닐지라도 그저 ‘색다름’과 ‘흥미로움’을 얻는 것만으로도 지루한 일상에 자극을 주어 다채로운 삶을 만들어 줄 수 있기에 새로운 ‘작은 만남’은 더욱 소중합니다.

송길영 마인드 마이너 (Mind Miner)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신문 최신기사

▶ 기사 제보하기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