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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경향시선]강물에 띄운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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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달무리가 곱게 피어났다고 첫줄을 쓴다.

어디선가 요정들의 아름다운 군무가 그치지 않으리니

이런 밤은 많은 것들을 떠오르게 한다고 쓴다.

저 물의 깊이를 알 수 없는 것처럼

도무지 당신의 마음도 알 수 없다고 쓴다.

이곳에 나와 앉은 지 백 년,

저 강물은 백 년 전의 그것이 아니라고 쓴다.

마음을 벨 듯하던 격렬한 상처는

어느 때인가는 모두 다 아물어 잊히리라 쓴다.

그럼에도 어떤 일은 잊히지 않으니

몇날며칠 같은 꿈을 꾸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쓴다.

알 수 없는 게 그것뿐이 아니지만

어떤 하나의 물음이

꼭 하나의 답만 있는 게 아니기에

저물어 어두워가는 물 위에 편지를 쓴다.

그러나 강물에 띄운 편지는

누구에게도 닿지 못하고 깊은 곳으로 흘러간다.

이학성(1961~)

경향신문

강물은 멀리 흘러간다. 흘러가서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길고 큰 강을 시간에 빗대기도 한다.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도 장강(長江)과 유사하다. 휘돌아가는 물굽이가 있다. 앞뒤 사정이 많다. 그 시간의 강물 위에 시인은 편지를 써서 띄운다. 달의 언저리에 월훈(月暈)이 곱다고 쓰며 누군가를 생각한다. 오랜 기다림과 그리움에 대해 생각한다. 바뀌고 달라지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난해해서 도무지 풀이할 수 없는 삶의 질문들을 생각한다. 그 질문들에 꼭 정해진 답은 없다. 누구도 하나의 마음이 아니기에. 시인은 반성과 살핌의 긴 편지를 써서 강물에 띄운다. 그러나 이 편지는 꼭 누군가에게 닿기를 바라며 보내는 편지가 아니라 자신에게, 수심(水深)이 깊은 자신의 마음에게 띄우는 서신이기도 하다. 내가 써서 내가 받아보는 편지도 의미가 크다. 따뜻한 말로 자신의 괴로움을 덜어주는 일도 필요하다.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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