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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아침을 열며]‘불만의 겨울’을 건너온 후배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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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하겠다는 말 처음 들었을 땐 무척 놀랐어. 뭐하러 그 고생을 하나 싶었거든. 그러나 정치에 인생을 걸어보겠다고, 잘 안된다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진 않을 거라는 다짐까지 듣고나니 가슴 밑바닥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나더라. “정치라는 게 짐승이 하는 거라고 쉽게 말하고 나와 관련 없는 것이라고들 하지만, 너무 중요한 일이잖아요. 또 누구나 정치를 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나마 정치를 할 수 있는 상황에 있는 사람들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정치를 하려고요.”

경향신문

후배 K야. 정동길 횡단보도 앞 신호등이 두 번 바뀔 때까지 발길이 떨어지지 않더라. 너의 강단 앞에서, 뭐랄까, 수직으로 내리꽂히는 소낙비를 맞은 느낌이었다. 솔직히 난 많이 지쳐 있었거든. 올 한 해 정치는 혐오와 불신 이외엔 달리 설명할 게 없었잖니. 사방천지 기댈 곳 하나 없는 사람들이 플래카드라도 들고 가는 곳이 국회 앞이라고, 그래서 아직은 정치에 희망을 걸어야 한다고. 정치부 기자인 선배에게 이런 말이라도 듣고 싶었을 텐데 난 네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40년 전 영국을 휘몰아쳤던 불만의 겨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네. 1970년대 영국은 경기 악화로 실업자만 300만명이 넘었지. 공공부문 4대 노조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그 유명한 ‘불만의 겨울’은 영국을 덮쳤어. 결국 1979년 총선에서 집권 노동당은 보수당에 패했고, 사상 첫 여성 총리 마거릿 대처가 등장해. 영국병을 고치겠다고 선언한 대처는 노조를 탄압하고 국영기업을 민영화하면서 자본이 지배하는 나라를 만들었지. 철의 여인은 영국병을 고쳤을진 몰라도 신자유주의라는 세계 병을 만들었어. 영국은 다시 불만의 겨울이었어. 오죽했으면 대처가 죽었을 때 런던 한복판에서 축제가 벌어졌을까. 하지만 보수당 통치 18년을 무너뜨린 노동당 당수 토니 블레어도 대처리즘을 포기하지 않더라. 다른 세상이 올 거라 믿었던 시민들에겐 신노동당 집권기도 불만의 겨울이었을 거야. 그러나 원로들은 60년대 승리의 추억에만 젖어 근본주의만 고수했지. 마키아벨리가 있었다면 아마 “성공했던 방식만 고수하면 반드시 망한다”라고 일갈했을 거야.

우리의 겨울은 어떨까. 이명박·박근혜 정권에서 혹독한 삭풍을 이겨냈으니 불만의 겨울은 없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김용균씨 사망 1주기인데도 위험의 외주화를 막자는 외침은 컨베이어 벨트에 끼어 있고, 청년층은 ‘실업’, 노년층은 ‘빈곤’이 삶의 대명사가 된 지 오래고. 어쩌면 우리의 촛불은 혁명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정치는 어디 있었나. 여권은 기존 방식만 답습했던 영국 노동당과 다르지 않았어. 세상사를 선과 악으로 가르는 관성을 못 버리더구나. ‘선한 권력이 하는 일은 옳다’는 거지. 측근 정치, 경제관료에 의존했던 과거의 실패를 따라하는 건 무슨 고집인지. 선거제 개혁도 후퇴하는 조짐이야. 민주당은 영국 노동당의 실패를 되새겨야 해. 블레어는 소선거구제 폐해를 극복하겠다며 선거제 개혁을 공약했지만 지키지 않았어. 블레어가 선거제를 바꿨다면 노동당은 대처리즘을 연장하지 않았을 테고, 그랬다면 영국엔 불만의 겨울이 없었을 테지.

보수 야당은 반문재인 하나로 연명하고 있잖니. 색깔론도 모자라, 대표가 청년들에게 52시간보다 더 일해야 한다며 새마을운동 시절 얘기나 하고 말이야. 불과 2년여 만에 부활하는 보수를 보며 우리 사회 기득권이 얼마나 강고한지 뼈저리게 느끼는 중이야.

‘조국대전’을 치르고 나선, 이 지독한 불신과 혐오를 이겨낼 힘이 남아 있는지 돌아볼 때가 많아. “조국대전도 이런 정치에 내 공민권을 맡기지 않겠다는 선언이겠죠. 맞아요, 올해 정치는 썩 매력 없었죠. 그러나 바닥까지 가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도 있지 않을까요.” 참 야무진 위로였다. 바닥까지 가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정치가 뭘까. 여기 광화문 주변엔 온갖 사연으로 줄 지어선 인파들이 많아. 긴 행렬을 볼 때마다, 사소한 것에 대한 간절함이 순간순간을 버티게 하는 힘이 아닐까 생각했어. 인생의 장르를 바꾸기로 결심한 넌 얼마나 많은 간절함이 쌓였을까. 불만의 겨울이 닥칠지 모를, 아니 이미 와 있을지 모를 이때 ‘봄’의 시인 이성부가 생각난 건 참 다행이다. ‘힘이 다하여 비칠거리는 발걸음들도/ 무엇 하나씩 저마다 다져 놓고 사라진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나는 배웠다…부질없음이 쌓이고 쌓여져서 마침내 길을 만들고/ 길 따라 그이를 따라 오르는 일/ 이리 힘들고 어려워도/ 왜 내가 지금 주저앉아서는 안되는지를 나는 안다.’(산길에서)

인생의 경계에서 숱하게 흔들렸을 불면의 밤이 이미 네겐 불만의 겨울이었으리라. 너의 다음 계절은 반드시 ‘정치’이길 바란다.

구혜영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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