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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민중통일운동 원로’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별세…한국 사회 질곡의 현장엔 그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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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전교조 탄생기부터 시작…미선 효순이 사건·FTA 반대 등

수감·투옥·석방…다시 거리로, 5·18민족통일학교 이사장 맡아

10일 광화문광장서 ‘민족통일장’

경향신문

지난 7일 노환으로 별세한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 한국진보연대 제공


‘민중통일운동’의 원로인 오종렬 한국진보연대 총회의장이 지난 7일 오후 10시57분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81세.

고인은 교사로 시작해 30여년 동안 교육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의 한 축을 이끌었다. 1938년 전남 광산군(현 광주광역시 광산구)에서 태어나 광주사범대학과 전남대학교를 졸업하고 교원 생활을 시작했다. ‘전국교직원노동조합(전교조)’과 탄생기부터 함께했다. 1987년 전교조의 전신인 전국교사협의회(전교협) 활동에 뛰어들어, 다음해 전교협 대의원대회 의장을 맡았다.

전교조가 출범한 1989년 초대 광주지부장을 지냈다. 당시 전남여고에서 교편을 잡던 고인은 정부가 전교조 활동을 불법화하면서 구속돼 3개월간 수감됐다. 집행유예로 풀려났지만 교사직에선 옥중 파면됐다. 광주 용봉중학교 교사로 복직하기까지 11년이 걸렸다.

사회로 돌아온 뒤 본격적인 통일운동가의 길을 걸었다. 1991년 무소속으로 제1대 광주시의회 의원에 당선됐다. 그 해 11월엔 ‘민주주의 민족통일 광주전남연합’ 공동의장에 선출돼 민족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출범을 이끌었다. 시의원으로 일하던 1994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2년8개월간 수감됐다. 정부가 이적단체로 규정한 조국통일범민족연합(범민련) 광주전남본부 결성을 주도하고 10여차례 이적표현이 담긴 유인물을 제작, 배포한 혐의를 받았다. 1997년 9월 출소한 뒤에도 통일운동을 이어갔다.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상임의장과 통일연대 상임대표, 국가보안법 폐지 단식단 단장, 우리쌀 지키기 운동본부 대표 등을 역임했다.

2000년대 굵직한 사회운동마다 그는 함께했다. ‘미선이 효순이’ 사건 당시 주한미군 반대 시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운동, 이명박 정부 초반 ‘광우병 촛불’ 등 한국 사회 질곡마다 목소리를 냈다. 최일선에서 운동을 벌이고, 수감되고, 출옥한 뒤 다시 거리로 나서는 삶이었다.

2006년엔 한·미 자유무역협정 범국민운동본부 공동대표로 반대 운동을 이끌다 구속됐다. 2007년 한국진보연대가 출범하면서 상임공동대표를 맡았다. 2008년엔 광우병 국민대책회의 공동대표로 활동하다 다시 구속됐고, 2009년 2월 출옥했다. 출옥 직후 한국진보연대 상임고문을 맡으며 일선에 복귀했다.

2015년엔 국립5·18민주묘지 인근인 담양에 ‘5·18 민족통일학교’를 세우고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후세 교육에 힘썼다.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교 교사로 민주화운동을 한 고인이 민주화운동 보상금으로 부지를 사들이고, 시민과 노동자들이 기부해 만든 학교다. 고인은 2014년 2월부터 간경화 등으로 건강이 악화돼 투병해 왔다.

한국진보연대는 8일 성명에서 “민족민주운동의 산증인이자 큰 어른이셨던 오 의장께서 열사들의 곁으로 떠나셨다”면서 “고인은 이 땅의 민주주의와 민중 생존, 민족의 자주와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에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라고 추모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영결식은 10일 오전 10시 광화문광장에서 시민사회단체의 ‘민족통일장’으로 치러진다. 같은 날 오후 4시부터 광주 조선대병원 장례식장에서도 조문할 수 있다. 발인은 11일 오전 8시다.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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