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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7 (월)

'세계경영 신화'에서 IMF 해체까지...김우중 영욕의 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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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샐러리맨 신화' 김우중 전 대우 회장, 향년 83세로 별세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이 9일 오후 11시 50분 향년 83세로 별세했다.

사단법인 대우세계경영연구회는 김 전 회장이 자신이 세운 수원 아주대병원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했다고 밝혔다.

김 전 회장은 약 1년여 간 투병 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본인의 뜻에 따라 연명치료를 행해지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빈소는 아주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조문은 10일 오전 10시부터 가능하다. 장례는 가족장으로 치러진다. 유족으로 부인 정희자 전 힐튼호텔 회장, 장남 김선협 (주)아도니스 부회장, 차남 김선용 ㈜벤티지홀딩스 대표, 장녀 김선정 (재)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사위 김상범 이수그룹 회장 등이 있다. 장지는 충남 태안군 소재 선영이다.

김 전 회장은 샐러리맨으로 출발해 한때 재계 2위 대우그룹을 키운 성공 신화의 대표적 인물이다. 이병철 전 삼성 회장, 정주영 전 현대 회장과 구분되는 점이다.

제주도 출신 부모 밑에서 5남 1녀 중 4남으로 대구에서 태어난 김 전 회장은 경기고 52회 졸업생으로 배우 신구, 이종찬 전 국가정보원장, 고건 전 국무총리, 박용오 전 두산그룹 회장, 이준용 대림그룹 명예회장, 조양래 한국타이어 회장이 동기다.

김 전 회장은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후 친척이 소유한 섬유 수출업체 한성실업에서 근무하다, 1967년 도재환 씨와 함께 자본금 500만 원으로 대우실업을 창업했다. 회사명은 도재환 씨가 근무하던 대도섬유의 대(大)와 김 전 회장의 이름 우(宇)를 따서 지었다.

대우실업은 트리코트 원단을 수출해 58만 달러 규모의 수출실적을 올린 뒤 세계 각지로 사업망을 넓혀가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샐러리맨 출신이 만든 회사의 모체는 상사였던 셈이다. 일본에서 주로 성장한 사업모델인 상사는 그 영향을 받은 한국에서도 국가가 전략적으로 수출을 장려하던 시기 비즈니스의 중심 모델이었다.

상사업으로 큰 자본을 모은 김 전 회장은 1969년 한국 기업 최초로 호주 시드니에 해외 지사를 세우는 등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당시부터 김 전 회장은 은행이 아닌 제2금융권으로부터 돈을 빌려 해외 회사와 계약을 체결한 후 돈을 갚는 식으로 사업을 키워 창업 5년 만에 수출 100만 달러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훗날 대우그룹 부도 사태의 원인이 당시는 성공 모델이었던 셈이다.

김 전 회장은 상사로 시작한 사업을 더 공격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1973년 영진토건을 인수해 대우개발로 사명을 변경, 대우실업과 합쳐 그룹 모태인 ㈜대우를 설립했다. 1976년에는 옥포조선소를 대우중공업으로 만들었다. 대한전선 가전사업부문을 인수해 대우전자를 세웠고, 새한자동차는 대우자동차로 사명을 바꿨다.

이처럼 공격적인 성장 이면에는 신군부의 비호가 있었다는 설도 나왔다.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인맥이 특히 두드러졌다. 김 전 회장은 1973년 이미 하나회 소속 장교와 사적 친분을 이용한다는 의혹에 휩싸여 이른바 윤필용 사건에 휘말림에 따라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기도 했다.

초기 중동붐으로 큰 성공을 거둔 김 전 회장은 80년대 들어 소련 붕괴에 따른 동구권 개방도 활발히 활용했다. 대우그룹이 해체된 후에도 동구권에서 오래도록 '대우'가 긍정적 의미로 인식됐다는 이야기가 이 때 나왔다. 당시 김 전 회장의 성공신화를 상징하는 용어가 그가 1989년 출간한 저서의 제목이기도 한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다. 김 전 회장 특유의 '세계경영' 신화는 특히 대우그룹 출신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의 성공 신화는 1990년대 들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신군부와의 인연은 민주화의 바람에 흔들렸다. 1993년 율곡비리, 1994년 전 한전 사장 뇌물수수 사건, 1995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 등에 휘말리면서 김 전 회장의 모습은 법정에서도 찾아볼 수 있게 됐다.

결정적인 타격은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였다. 대규모 차입으로 공격적으로 세를 불린 후, 영업력으로 이를 갚아 나가는 대우그룹 특유의 경영 스타일은 외환위기에 발목을 잡혔다. 이 시기에도 김 전 회장은 쌍용자동차 인수 등 공격적 경영을 밀어붙여 한때 대우그룹은 현대그룹에 이어 재계 2위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 사이 구조조정되지 않고 비대해진 그룹 상황은 유동성 위기를 맞아 더 크게 흔들렸다. 유동성 위기를 맞은 대우그룹은 1999년 말까지 41개 계열사를 4개 업종 10개 회사로 줄이는 구조조정 방안을 제출했으나, 1999년 8월 26일 어음 만기 사태를 이기지 못하고 워크아웃을 신청했다. 그로 인해 샐러리맨 신화는 막을 내렸다. 특히 2000년까지도 최고 실적을 거두며 승승장구하던 대우자동차도 2002년 부도 사태를 이기지 못하고 청산됐다.

김 전 회장은 그룹 해체 이후 성공 신화에서 분식회계, 사기 대출 혐의를 받는 수배자가 됐다. 그가 받은 주요 혐의는 대우그룹 분식회계 주도다. 그는 베트남으로 장기 도피해 잠적해 간간이 한국 언론과 인터뷰를 통해 얼굴을 비치며 천천히 사람들에게 잊혔다. 한때 대우자동차 노조는 해외에 도피한 김 전 회장을 공개수배범으로 지적, 그에게 현상금 500달러를 걸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은 2006년 징역 8년 6개월, 벌금 1000만 원, 추징금 17조9253억 원의 형을 구형받았으나, 2007년 말 노무현 전 대통령 특사로 사면됐다. 추징금 규모가 매우 크지만 김 전 회장이 별세해 추징은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김 전 회장은 별세 전까지 대우그룹 해체를 안타까워했다. 김 전 회장은 IMF 외환위기 사태 해결을 위해 대우그룹이 희생됐다는 생각을 오래도록 굽히지 않았다. 김대중 정부와 대우그룹의 인연이 없어,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대우그룹을 희생시켰다는 주장이다.

돌이켜 보면, 김 전 회장은 시대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외환위기 전까지 한국 재벌의 특징은 대규모 빚을 져 수출시장을 공격적으로 공략하는 것이었다. 재벌의 덩치 싸움이 곧 사업 영역 싸움이었던 시절이다. 하지만 이 공격적 경쟁의 대가는 대규모 부실이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김대중 정부는 모든 기업에 부채율 200% 선을 지키도록 요구했다. 역으로 보자면, 과거 한국이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의 기업상이 '큰 빚으로 공격적 성장'이었다면, 지금은 부채비율을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등 내실 다지기와 부동산 투자에 기업이 집중하는 대신, 과거와 같은 공격적 성장은 어려운 시기가 됐다.

프레시안

▲ 故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대우세계경영연구회 제공


기자 : 이대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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