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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계약의 수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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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게티이미지뱅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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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석우 변호사의 법률 이야기-127] 한국인의 평균적인 수명은 대략 82세라고 한다. 태어나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아무리 큰 어려움을 겪더라도 혹은 운이 좋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해도 대략 80세를 넘으면 죽음을 염두에 둘 시기가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태어나고 자라서 제 역할을 다하다가 삶을 마무리 짓는 게 사람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끼리의 약속인 계약도 태어나서 계약에서 정한 약속이 살아서 법률적 힘을 발휘하는 시기가 지나면 그 존속기간이 다하는 때를 맞이하게 된다. 계약은 그것을 지키지 않는 당사자에게 반대편 당사자가 법원의 힘을 빌려서 강제로 계약 내용을 실현시킬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이 팔팔하게 살아 있는 동안 다시 말해 계약이 목적을 다해 수명을 다하는 그날까지 계약에서 정한 약속은 반드시 준수돼야 한다(pacta sunt servanda).

사람의 생명은 미리 정해놓을 수 없지만 계약은 사람이 정하는 것이기에 계약 수명만큼은 미리 정해둘 수 있다. 전세계약 기간을 2년으로 정해두었다면 전세권자가 그 집에서 거주자로 당당히 살 권리와 집 소유주가 전세보증금을 받아 둘 권리가 딱 2년간 보장된다는 말이다. 그 후에는 권리의 근거인 전세계약이 생명을 다하게 됐으므로 더 이상 자신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 죽어가는 계약을 되살리기 위해서는 서로 계약 수명을 연장하자는 합의를 하거나 법률이 정한 요건에 맞춰 계약 갱신 절차를 밟아야 한다.

사람이 죽으면 말을 할 수 없듯 계약기간이 만료해 수명을 다한 계약도 "약속은 준수돼야 한다"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계약이 문제되는 사안에서는 그 계약이 현재 살아 있는 것인지 죽어 있는 것인지를 감별해 내는 것이 기본 중에 기본이 아닐 수 없다.

몇 달 전 약정금 사건의 피고 사건을 수임했는데 언뜻 보기에도 너무 복잡했다. 복잡한 산식을 동원해 계산해야 하고 사실관계도 한참 꼬여 있다. 배후 이야기가 두껍게 있는 데다 거기에는 당당히 밝힐 만한 유리한 사실도 있지만 그 과정에 꼬투리가 잡혀 소송이 더욱 난항을 겪게 할 사실관계도 있다. 어디까지 밝혀야 하고 어디부터는 침묵을 지켜야 할지 결정하기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상대방인 원고는 몇 년 전 작성됐다는 계약서상의 한 조항을 토대로 약정금 청구를 넣었다. 문제의 계약서에 우리 의뢰인 회사의 법인인감과 동일해 보이는 도장이 날인돼 있기는 한데 회사에서는 그런 계약서를 작성한 사실이 없다고 한다. 어쨌든 계약서에 회사 법인인감과 거의 동일해 보이는 도장이 날인돼 있는 이상 다른 방어책을 몇 겹씩 쳐 두어야 할 텐데 여기에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고 항변 사실을 정리하기가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몇 차례 변론이 거듭됐고 다음 주에 변론기일이 지정돼 있다. 여기에 대비해 며칠째 고민하며 준비서면을 작성하며 그간 쌓인 입증 자료들을 찬찬히 다시 살펴봤다.

그런데 문제의 계약서에 계약기간에 관한 조항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 "계약기간은 2년으로 한다"는 짤막한 문구가 다른 계약문구 속에서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게다가 계약기간을 연장하기 위해서는 우리 의뢰인 회사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문구까지 있다. 계약서 자체를 알지 못한다고 하는 마당이니 계약기간 연장에 대한 동의가 있었을 리 만무한 일. 이 계약서는 이미 수명을 다했고 약정금 청구의 근거가 될 수 없는 노릇이다. 한 방에 소송을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것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간 주장해 왔던 항변 사실들의 논리를 좀 더 정리해 그 뒤에 배치했다. 별다른 일이 없는 한 소송의 끝에서는 우리 의뢰인의 손이 올라갈 듯싶다.

민사변호사가 권리의 소멸시효를 맨 먼저 따지고 검사가 공소시효를 먼저 따지듯 계약이 문제되는 사안에서는 그 계약이 살아 있는 것이지 죽어 있는 것인지를 먼저 따져봐야 한다. 이 평범한 원칙을 새삼스럽게 절감한 사건이 됐다.

[마석우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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