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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7 (토)

[사유와 성찰]여전히 ‘메리 크리스마스’ 가능한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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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 우울한 겨울, 여느 때처럼 크리스마스가 다가온다.

몇 해 전 12월에 미국의 한 신학자가 한국을 방문해 함께 식당에 갔다. 식당 내 TV에서는 ‘메리 크리스마스’라는 말이 연신 튀어나왔다. 메리 크리스마스를 영어로 알아들은 그 미국인 교수는 빙그레 웃으면서 나에게 물었다.

경향신문

“한국은 여전히 ‘메리 크리스마스’가 가능한가요?”

질문의 의도 파악이 안된 나는 질문의 배경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미국은 오래전에 우리가 수입해온 문구 ‘메리 크리스마스’를 더 이상 쓸 수가 없다. 마트마다 판매하는 크리스마스카드를 열어보면 속지에는 ‘메리 크리스마스’ 대신 ‘해피 홀리데이즈(Happy Holidays)’가 자리 잡고 있다. 사적인 대화에서 ‘메리 크리스마스’를 주고받는 일을 금할 길은 없겠지만, 공식적인 인사말을 쓰는 경우엔 ‘해피 홀리데이즈’로 해야 종교편향 시비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가 국교와 같은 자신의 나라에서 자유롭게 쓸 수 없게 된 ‘메리 크리스마스’가 한국 땅에는 아직도 버젓이 통용되는 것에 대해 미국인 신학자가 내심 부러워 던진 질문이었던 것이다.

그는 “역시 메리 크리스마스!”라며 엄지를 들어보였다.

우리나라도 공공영역에서는 종교편향에 대해 꽤 민감하게 주의를 기울인다. 10여년 전 일이다. 공영방송에서 내게 강연 요청을 해왔다. 당연히 강연 주제는 내 세부전공인 상담에 대한 내용이었다. 프로듀서는 내 소속 표기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종교성이 느껴지는 ‘신학대학원 교수’ 대신 ‘상담센터 소장’으로 표기하자는 것이었다. 그는 평소에 성직자나 신학자를 강연에 모시면 늘 종교편향성 시비가 생긴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강사가 기독교 성직자라면 크리스마스 시즌에나, 스님이라면 초파일에나 가능하다고 했다. 요즘엔 크리스마스 시즌이 아니어도 내 소속을 신학대학원이라고 밝힐 수 있어 참 다행이다.

분명 크리스마스는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구세주 탄신일이다. 하지만 지구 곳곳에서 크리스마스는 이런 종교적 의미 이상의 신비스러운 포용력을 보여준다.

한 잡지에서 흥미로운 기사를 본 적이 있다. 크리스마스 시즌에 미국 텍사스주 한 지역의 알렌이라는 사람이 문화 교류 행사의 일환으로 러시아에서 온 한 랍비를 자신의 집에 머무르게 하였다고 한다. 알렌과 그 가족은 이 랍비에게 러시아에서는 맛볼 수 없는 음식을 소개하기 위해 자신들이 좋아하는 중국음식점으로 랍비를 데리고 가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음식을 먹는 내내, 랍비는 본국 러시아의 열악한 실정과 비교하여 미국의 경이로운 것들에 대해 이야기를 이어갔다. 식사가 끝나자 웨이터가 계산서를 가져다주면서 조그만 크리스마스트리 모양의 장식품을 선물로 나누어 주었다. 알렌의 아버지가 그 조그만 장식품의 바닥에 ‘Made in India’라고 쓰여 있다고 말하자 모두 재미있어했다.

그러나 웃음소리가 가라앉자, 사람들은 러시아의 랍비가 조용히 흐느끼는 것을 발견했다. 알렌의 아버지는 혹시 유대교 랍비에게 크리스마스에 관한 선물을 주어서 기분을 상하게 한 것은 아닌지, 조심스레 랍비에게 물어보았다.

랍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아닙니다. 저는 불교신자인 중국 사람이 저 같은 유대인에게 힌두교를 믿는 인도 사람이 만든 크리스마스 선물을 줄 수 있는 곳에 이렇게 있다는 사실에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는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서로 종교와 신념이 다르고 피부색이 다른 이들이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감격했을지 모른다. 예수의 동정녀 탄생만이 기적이 아니다. 종교를 초월하여 누구나 이 시기가 되면 잠시나마 미움을 내려놓고 포용의 마음을 품고 함께하는 것이 진정 크리스마스의 기적이다.

매일 크리스마스라면 참 좋으련만, 유난히 국론이 분열되고 세대 간, 계층 간 갈등이 첨예해진 올해 말에는 더욱더 크리스마스의 기적을 기대하고픈 심정이다. 누구보다도 청와대 앞에서 대통령과 정부에 연일 비난 공세를 퍼붓는 한기총 소속 기독교인들에게 올해 크리스마스가 따뜻한 포용의 마음을 선사하길 간절히 기도한다.

서로 종교적 신념과 정치색이 다르더라도 잠시라도 반목과 미움을 내려놓자. 여전히 힘껏 외쳐본다.

메리 크리스마스!

권수영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상담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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