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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1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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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은 사람을 풍요롭게 한다 …美 개념미술가 제니 홀저의 조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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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홀저.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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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쑈 아트썰-43]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천장에 매달린 길이 6.4m LED(발광다이오드) 사각기둥이 반짝거렸다. 크리스마스 장식 같지만 화면에 뜬 문장들은 끔찍하다.

김혜순 시집 '죽음의 자서전' 중 '질식' 시구들이 빛을 뿜으며 펼쳐진다. '지하철이 떠나자 늙은 남자가 다가온다. / 남자가 너의 바지 속에 까만 손톱을 쓰윽 집어넣는다. // 잠시 후 가방을 벗겨 간다. / 중학생 둘이 다가온다. 주머니를 뒤진다. / 발길질.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 소년들의 휴대폰 안에 들어간 네 영정사진.'

한강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중 '거울 저편의 겨울 11'도 화면을 수놓는다. '아직 광장에 비가 뿌릴 때 // 살해된 아이들의 이름을 수놓은 / 흰 머릿수건을 쓴 여자들이/ 느린 걸음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여성의 상처와 고통을 담은 한국 문학을 강렬한 화면으로 바꾼 작가는 미국 개념미술가 제니 홀저(69)다. 40여 년간 텍스트(text)를 매개로 사회와 개인, 정치적 주제를 다뤄왔다. 그가 2017년부터 진행한 국립현대미술관 커미션 프로젝트 '당신을 위하여 : 제니 홀저' 결과물을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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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홀저 `당신의 위하여`.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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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을 담은 로봇 LED 작품 '당신을 위하여' 외에도 서울관 로비 벽면에 1000장이 넘는 포스터로 설치된 초기작 '경구들(Truisms)'(1977~1979)과 '선동적 에세이(Inflammatory Essays)'(1977~1982), 과천관의 석조 다리 위에 11개의 '경구들에서 선정된 문구들'을 영구적으로 새긴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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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홀저 `경구들에서 선정된 문구들`. /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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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이번에 처음으로 한글로 작업했다. 구조적이고 함축적인 작가의 언어를 적절하게 해석하기 위해 소설가이자 번역가 한유주, 안상수 파주타이포그라피학교 교장 등이 협업했다.

홀저는 1970년대 후반 격언, 속담, 잠언과 같은 형식으로 역사와 정치적 담론, 사회 문제를 쓴 경구들을 뉴욕 거리에 게시하면서 본격적으로 텍스트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티셔츠, 모자 등과 같은 일상 사물부터 석조물, 전자기기, 건축물, 자연 풍경 등에 언어를 투사하는 초대형 프로젝션까지 제작했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장을 찾은 그는 "추상화가가 되고 싶었는데 실패했고, 명확하게 드러나는 콘텐츠를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며 "둘 사이에서 타협점을 찾지 못하다가 언어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텍스트 작업 배경을 밝혔다.

기성 미술계에 편입하지 못했지만 절망하지 않고 남과 다른 길을 선택한 덕분에 1990년 제44회 베니스비엔날레 미국관을 대표하는 첫 여성 작가로 선정됐으며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후 구겐하임 미술관(뉴욕, 빌바오), 휘트니미술관, 루브르 아부다비, 뉴욕 7 월드트레이드센터 등 세계 유수 미술관과 공공장소에서 작업을 펼쳤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공간에 맞춰 제작된 '당신을 위하여'에는 김혜순, 한강뿐만 아니라 재미 한인 작가 에밀리 정민 윤, 우크라이나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쿠르드족 출신 여성운동가이자 시인 호진 아지즈 등 현대 문학가 5명의 작품을 통해 여성 화자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게 한다. 역사적 비극, 재앙 혹은 사회적 참상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이들의 생각을 추적하며 미술관을 공감과 대립, 소통과 회복의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작가는 상처와 고통을 다룬 문학 작품 선정에 대해 "나는 자신과 타인을 걱정하게 하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작가"라며 "그런 주제 중 하나가 여성이었고, 피해자이자 동시에 맞서 싸운 여성 이야기를 하려고 했다"고 설명했다.

서울관 로비 벽면에 붙은 '경구들'(1977~1979) 시리즈는 문장 240여 개로 이뤄진 작품이다. 1977년 참여했던 휘트니미술관 독립연구프로그램에서 론 클라크가 제공한 추천 도서 목록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각각의 문장은 복잡하고 어려우며 논란의 소지가 있는 아이디어를 간결하고 직접적인 발언으로 정제했다. 그 어떤 입장도 고수하지 않은 채 사회적 믿음, 관습, 그리고 진실을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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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 홀저 `경구들과 선동적 에세이`./사진제공=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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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동적 에세이'(1979~1982)는 각각 100개의 단어로 이뤄진 에세이 컬렉션이다. 색지에 인쇄돼 맨해튼 도심에 부착됐던 이 글들은 정치, 유토피아, 예술, 종교에 관한 글과 선언문 등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각 글의 어조는 선언문의 형식을 차용해 단호하며 특정한 입장을 지지한다. 홀저는 글을 읽는 독자가 이데올로기만을 가늠할 수 있도록 그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익명으로 글들을 제시한다. 이 글들을 통해 우리는 사회 변화의 필요성, 대중조작의 가능성, 혁명을 위한 조건들을 고민하게 된다.

과천관의 석조 다리 위에 새긴 경구 11개는 구구절절 옳은 말들이다. '지나친 의무감은 당신을 구속한다' '사람은 꿈 속에서 솔직하다' '따분함은 미친 짓을 하게 만든다' '고독은 사람을 풍요롭게 한다' '선택의 자유가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라' '당신은 과거이고 현재이며 미래다' '가질 수 없는 것은 언제나 매력적이다' '자신의 몸이 하는 말을 들어라' '모든 것은 미묘하게 서로 연결되어 있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를 똑같이 양육하라' '당신의 모든 행동이 당신을 결정한다' 등이 마음속으로 콕콕 들어와 박힌다.

전시 연계 프로그램으로 영화 제작자 클라우디아 뮬러의 다큐멘터리 두 편이 서울관 필름앤비디오(MFV)에서 상영된다. 작가 여정을 추적한 '어바웃 제니 홀저'(2011), 작품 세계를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줬던 다른 여성 작가들에 관한 견해를 밝히는 '여성 예술가들: 제니 홀저'(2017)를 함께 상영한다. 영화 상영 외에도 학예사, 미술비평가, 문학비평가 등 전문가와 함께하는 대화 행사가 전시 기간 동안 진행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후원회는 '당신을 위하여' '경구들에서 선정된 문구들' 2점을 구입해 미술관에 기증했다. 후원회는 2011년 국립현대미술관 발전을 위해 발족한 경영인 모임으로 매년 뉴미디어 작품 수집을 지원하고 있다. 2012년 문경원&전준호의 'News from Nowhere', 2018년 히토 슈타이얼의 'Liquidity Inc', 에이샤-리사 아틸라 'Horizontal-Vaakasuora' 등을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번 전시는 내년 7월 5일까지.

[전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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