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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0 (월)

승포자도 억대 연봉… 더 단단해진 '은행 철밥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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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시중은행의 50대 지점 차장 박모(52)씨. 주위 동료들은 박씨에 대해 "출근해서 전화 한 통 받고 퇴근하는 것이 전부"라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박 차장의 연봉은 연차에 따라 차곡차곡 늘어나 이젠 1억원이 넘는다. 다른 은행들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다. 리딩 뱅크라고 자부하는 B은행 역시 만년 대리, 만년 차장이 넘쳐난다. 이 은행에서 10년 넘게 대리 직급을 달고 있는 김모(43)씨는 출퇴근만 제시간에 할 뿐 업무를 거의 하지 않아 동료들에게 업무가 과중되고 있다. 그의 동료는 "은행권에선 김씨 같은 직원들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일터 분위기만 나빠진다"고 말했다.

국내 금융회사 3곳 가운데 2곳이 호봉제를 고수하고 있다. 전체 업종 평균의 4배이고, 전 산업 중 1위다. 지난 9년간 전체 업종 호봉제 도입률이 30.2%포인트 감소하는 동안 금융 업종은 70% 수준을 맴돌았다. 5대 시중은행과 씨티·SC은행 등 외국계 은행은 호봉제에 머물러 있다. 은행들은 기득권 노조에 번번이 가로막혀 임금체계 개편에 실패하면서 억대 연봉을 받는 '월급 루팡'들을 양산하고 있다.

◇호봉제 뒤에 숨은 은행권 억대 연봉자들

지난 9일 코트라는 50년 넘게 유지해 온 호봉제를 폐지하고, 직무의 난도나 중요성에 따라 임금이 달라지는 직무급제를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호봉제가 열심히 일할 동기를 없애는 낡은 시스템이란 게 폐지 이유였다. 금융권에서도 올 들어 교보생명이 직무급제를 도입하며 경직된 임금체계 뜯어고치기에 나섰다. 공공기관조차 호봉제 폐지를 선언했지만, 국내 은행들은 연차만 쌓이면 쉽게 억대 연봉자가 될 수 있는 연공서열 위주 임금체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2일 금융 업계와 고용노동부 등에 따르면, 2019년 기준 금융 업종 호봉제 도입 비율은 67.5%에 달한다. 호봉제 도입 비율이 50%를 넘는 업종은 금융 업종이 유일했다. 특히 2011~2016년까지 금융 업종보다 호봉제 도입 비율이 높았던 전기가스 업종은 2014년 80.1%에서 지난해 48.7%로 지속적으로 감소했지만 금융 업종은 이 기간에도 70% 전후를 유지했다.



조선비즈

일러스트=박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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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영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호봉제는 직원들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는 데 도움이 안 되는 제도"라며 "해외 금융사들이 치열하게 경쟁하며 경쟁력을 키워가는 상황에 국내 은행들은 마치 스스로 공무원이라고 여기며 바뀌려고 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호봉제 덕분에 은행원 10명 중 3명은 억대 연봉자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2018년 말 기준 연봉 1억원 이상 은행원은 30.1%다. 전체 은행원이 13만명이란 점을 감안하면 4만명가량이 억대 연봉자인 셈이다. 일하지도 않고 의욕도 없는 '승포자(승진 포기자)'들도 때가 되면 억대 연봉자가 된다. 금융계 원로는 "전국 지점을 돌던 때 한 은행원이 개인 면담을 요청하며 '일하는 직원들에게 그에 걸맞은 보상을 해줘서 분위기를 바꿔달라'고 말하더라"라며 "오죽 답답하면 그랬겠는가"라고 했다.

◇기득권 노조에 막혀 번번이 실패

2016년에 연봉제 도입 시도가 있었지만, 문재인 정부 들어 입김이 세진 금융노조 등 노동계의 반발에 부닥쳐 모두 무산됐다. 2016년 IBK기업은행은 이사회에서 성과연봉제 도입을 의결했다. 하지만 금융노조는 성과연봉제를 저지하겠다며 그해 9월 총파업에 돌입했다. 임종룡 당시 금융위원장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파업은 정당성을 얻기 어렵다"며 성과연봉제 확산을 유도했다. 2016년 말 시중은행들도 일제히 성과연봉제 도입에 나섰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고 은행권은 지금도 호봉제를 유지하고 있다. IBK기업은행은 이사회 의결 직후 노조가 제기한 성과연봉제 도입 무효소송에서 패소해 호봉제 폐지가 무산됐다.

한 시중은행 인사팀 관계자는 “일하는 분위기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저성과자들을 티 안 나게 일부 부서에 배치하고 있지만 한계가 있다”며 “임금체계를 바꾸지 않는다면 생산성 향상과 비용 절감은 어려울 것”이라고 밝혔다. 저성과자를 배치하는 대표적인 부서로는 여신감리부가 뽑힌다. C시중은행의 여신감리부 사무실엔 직원 30명 중 20명이 억대 연봉을 받는 50대 은행원이다. 그렇다고 여신감리부에 일이 없는 게 아니기 때문에 연차가 낮은 여신감리부 소수 인원이 30명이 해야 할 일을 대부분 떠안게 된다는 것이 내부 분위기다.

◇매년 1조원 넘는 은행권 희망퇴직금

호봉제를 유지하면서도 불필요한 인력을 줄이기 위해 은행들은 희망퇴직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그러나 시중은행 한 곳당 지출되는 퇴직 비용이 연평균 3000억원 안팎에 이른다. 4차 산업 시대에 금융 혁신이 절실하고 여기에 많은 투자가 필요한데, 은행들은 억대 연봉자들에게 또다시 억대 퇴직금까지 안겨주는 데 천문학적 돈을 쓰는 것이다. 금융감독원 공시에 따르면 국내 4대 은행의 희망퇴직금을 포함한 해고 및 퇴직 비용은 2018년 한 해 동안 1조2298억원에 달했다. 2015년 1조4549억원, 2016년 2조287억원, 2017년 1조3692억원을 기록했다. 중도 이직률이 높지 않은 은행 업종 특성상 이 비용의 대부분이 희망퇴직 비용으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2019년에도 3분기까지 6335억원의 해고 및 퇴직 비용이 지출됐다.

우석진 명지대 교수는 “강성 노조뿐만 아니라 은행의 공공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관료들 때문에 한국 금융 산업은 다른 산업에 비해 낙후돼 있다”며 “호봉제를 뜯어고치고 성과급 위주의 임금체계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윤진호 기자(jinho@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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