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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2 (화)

"한국놈이 일본놈보다 더 잔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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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이번 36회가 마지막회다.(편집자)

바로가기 :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처음부터 보기

36장 저 거친 험한 바다 지키는 사람

오민균이 처형된 때로부터 18년 뒤인 1966년 11월 28일이다. 겨울의 초입, 날씨가 쌀쌀한 가운데 오민균의 고향 충북 청원군 현도면 우록리에서 10여 km 떨어진 연기군 부강면(현 세종시)에서 대한플라스틱 공장 준공식이 있었다.

이 공장은 충청도 출신 기업인이 당시 거대 자본인 내자 5억2천7백만원, 외화 360만 달러를 투입해 세운 PVC, 염화비닐 수지를 생산하는 대형 생산시설이었다. 한일국교 회담 체결 이후 일본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으로 지은 공장이었다.

연간 PVC, 가성소다를 대량생산해 각종 식용기(食用器), 배관, 공업용 PVC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는 정부의 중화학공업정책에 시동을 건 첫 사업이었다. 이 자리에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했다. 기간 산업의 하나였으니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축사를 했다. 준공식에는 지역 출신 유지들이 대거 참석했다. 그중 공화당 출신 국회의원 신관유는 지역의 대표적 인물이었다.

"임자, 내 차 타지."

준공식 일정을 마치고 대통령 전용차가 서울로 올라갈 때, 박정희가 신관유 국회의원이 눈앞에 보이자 전용차에 동승할 것을 요구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경호가 엄격하지 않은 때인지라 대통령은 마음에 맞는 사람을 더러 전용차에 동승시켜 대화를 나누며 함께 출장지를 다니고 있었다.

"네, 알겠습니다 각하."

신관유는 자신의 승용차 운전사더러 뒤따라 오도록 하고 대통령 전용차에 올라 대통령의 옆자리에 앉았다. 신관유는 속으로 옳다구나 했다. 이 무슨 행운인가. 이런 자리는 만들려해도 좀처럼 기회가 오지 않는다. 서울에 도착할 때까지 세 시간여를 각하와 독대하는 시간인 것이다.

이 기회를 살리면 자신의 불명예를 씻을 기회도 된다. 그는 메사돈 마약 밀매 사건에 연루돼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자칫하면 다음 국회의원 선거 때 공천을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사실 탈락한다고 보아야 했다. 혐의에서 벗어나긴 했으나 도하 신문에선 이미 그를 혐의자로 인정해 대대적으로 보도한 뒤였다.

메사돈 마약사건이란 합성 마약 메사돈을 넣어 진통제로 만들어 불법 제조,판매한 사건이다. 1965년 전국적으로 마약 중독 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이 급증했다. 정부가 조사에 나섰으나 합법적으로 유통되고 있는 진통 주사제가 널리 퍼져 있다는 사실 외엔 밝혀내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농사일을 하는 농부들, 바다에 나가는 어부들이 한 통씩 진통제를 가지고 다니면서 그 신묘한 약을 먹었고, 사창가에서도 널리 유통되었다. 이로 인해 정부 집계 3만, 전문가에 따르면 10만으로 추산되는 중독자가 생겨났다.

보건사회부가 해당 의약품을 수거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감정을 의뢰해보니 제3의 물질인 합성마약 메사돈이 함유되었음을 밝혀냈다. 수사 과정에서 해당 제약회사 대표가 구속되고, 담당 관리와 공화당 소속 국회의원 신관유가 수뢰 혐의로 입건되었다.

이 사건은 마약으로 허가된 의약품에 섞어 제조,판매했다는 점과, 관계 공무원과 국회의원이 뇌물을 받고 묵인해주었다는 점에서 사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http://blog.daum.net/gmania65 일부 인용>

박정희는 민생사범에 대해선 가차없이 처단했다. '이 나라 사회의 모든 부패와 구악을 일소하고 퇴폐한 국민 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잡기 위해 청신한 기풍을 진작시킨다'는 혁명공약을 지키기 위해 전국의 깡패를 소탕해 한라산 중간을 깎아 제주시와 서귀포를 연결하는 도로건설에 투입했고, 축첩자, 마약사범, 밀수범, 부정부패분자를 잡아들였다.

정치적 정통성을 위협받고 있는 처지에 이런 민생범죄를 뿌리뽑는 것은 무엇보다 민심을 안정시키고 참신한 모습을 보여주는 힘이 되었다.

박정희는 1963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에게 10여 만표라는 아주 근소한 표차로 당선돼 정치적 정통성을 위협받는 등 곤경에 처해 있었다. 이러다가는 재선이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팽배했다.

박정희는 육사 8기에 힘입어 1961년 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군사정부 초기 내부의 주류파와 비주류파 사이의 주도권 쟁탈전에서 반혁명사건이란 이름으로 비주류를 숙청한 뒤 군권과 정권 장악의 기반을 다졌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대학생층을 중심으로 한 지식층과 야당의 공격에 시달렸다. 특히 학생운동 세력은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힘을 갖고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쿠데타 2년 후 정권을 민간에 이양하겠다는 일정을 발표했으나 번의를 거듭했다. 말이 고상한 번의지, 정직하게 말하면 거짓말이었다.

혁명과업이 성취되면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정권을 이양하고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것이라고 했던 혁명공약이 이런 번의로 무색해져버렸다. 그 사이 군사정부는 증권파동,워커힐사건,새나라자동차사건,빠찡꼬사건 등 4대 부정사건의 중심에 섰다.

민정이양에 따른 공화당 창당 작업을 위해 정치자금 확보 차원에서 주류 세력이 저지른 부정과 비리였는데, 동아일보 등 비판 언론이 가만 있지 않았다. 부정부패 척결과 구악 일소를 혁명공약으로 내걸었던 군사정부의 혁명정신이 퇴색했다고 비판했고, 그래서 '구악 뺨치는 신악'이라고 공격했다. 군 일부에서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군 본연의 길로 돌아가자고 주장했다.

박정희가 숙원사업으로 내세운 것은 반만년 역사를 관통해온 기아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었다.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 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는 혁명공약 4항을 이행하는 문제가 정치적 공격을 잠재우고, 여론의 지지를 받는 힘이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했는데, 재원마련이 쉽지 않았다. 조달 방법은 한,일국교정상화를 추진해 일본으로부터 배상금과 차관을 받는 일이었다. 배상금은 3억달러, 차관은 2억달러였다.

그러나 굴욕외교, 흑막외교라는 비난을 받고 대대적인 학생 시위와 함께 1964년 6.3사태를 맞았다. 한국 어민의 생명선이라 할 수 있는 어업 및 평화선 문제와 3억 달러의 대일청구권자금이 배상금 치고는 적다는 비판을 받았다.

박정희는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면 모든 모순은 극복된다고 보고, 숙원인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경제개발 카드를 꺼내들었다. 공장을 지어 제품을 내다 팔아 국부를 창출하고, 쌀과 연탄 걱정없이 국민을 먹여살리겠다는 계획이다. 이를 위해 일본으로부터 청구권자금은 물론 외자를 도입하는 것이었는데, 대한플라스틱 공장 건설 차관도 그런 한일국교 정상화에 따른 부수적인 사업이었다

신관유는 대통령 전용차에 오르자 가슴이 뛰었다. 횡재 같은 행운을 살리고 싶었다. 그는 화제를 풍부하게 하기 위해 박정희와 인연이 닿는 사람들을 생각해내고, 옳다구나, 했다. 박정희가 군대 초기 아꼈다는 일본 육사 후배 오민균을 떠올린 것이다. 오민균은 신관유의 청주중학 동기동창이었다.

"각하, 지금 청원군 현도면 우록리를 지나고 계시는데, 이곳이 누구 고향인 줄 아십니까?"

"뭔데? 임자 고향 아닌가?"

박정희가 퉁명스럽지만 당연한 말 아니냐는 투로 대꾸했다.

"제 고향이기도 합니다만, 오민균 소위의 고향입니다."

"오민균 소령?"

앞을 바라보며 오민균의 이름을 짧게 뇌던 박정희가 주춤 하는 빛을 보였다. 대통령 옆 얼굴을 함부로 볼 수 없었던 신관유는 설명이 미진해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힘주어 설명했다.

"오민균이 제가 서울대학 다닐 때, 토요일마다 외출 나와서 저와 자주 만났습니다. 그때마다 대통령 각하를 자랑했습니다. 가장 존경하는 일본 육사 선배를 경비대사관학교에서 만났고, 그분은 제2의 나폴레옹이라고 했습니다. 군사이론에 밝고 정의감과 민족의식이 강한 선배님이라고 했습니다. 아, 저기 오민균이 다녔던 현도초등학교가 보이는군요. 그는 소학교 때부터 공부든 운동이든 못하는 게 없었습니다. 청주중학 시절에는 학생지휘부를 맡으면서 통솔능력이 뛰어나 장차 장군이 될 것이라고 모두들 믿었습니다. 그래서 군인의 길을 갔는데, 천재들만 들어간다는 일본 육사를 들어갔던 것이죠."

정말 대통령과의 인연을 끌어오는 데는 오민균만한 친구가 없었다. 오민균은 경비대사관학교 교관 후임으로 박정희를 천거했으며, 박정희 역시 기질적으로 자신을 닮았다며 오민균을 친동생처럼 아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후배가 선배를 후임 교관 천거를 했다고 말하면 자존심 상할 것 같아서 그 부분은 뺐다.

그런 언질만으로도 대통령이 오민균을 추억할 것이고, 그렇다면 그것을 고리로 자신과 대통령간의 인연이 깊어질 것이다. 없는 인연도 억지로 만들어서 접근하는 것에 비하면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아름다운 추억의 선물인가. 이런 스토리텔링을 갖고 있다는 것이 보물을 찾은 것만큼이나 기뻤다. 그런데 대통령이 입을 굳게 다문 채 반응이 없었다. 굳은 얼굴로 앞만 주시하고 있을 뿐, 미동도 하지 않았다. 멋쩍었지만, 그렇다고 하던 얘기를 그만둘 수 없어서 신관유는 마저 설명했다.

"그의 동생 오보균은 육사 5기 출신입니다. 김재춘 정승화 채명신 장지량 김학원 장군과 동기생이죠. 아마 대통령 각하께서 육사 교관으로 계실 때 가르친 청년일 것입니다. 그들 형제 청년장교들은 우리 고장의 자랑이었습니다. 그런데 참 안타깝게도 둘 다 죽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박정희를 슬쩍 훔쳐본 신관유는 아차, 하고 후회했다. 잘못 말한 것인가. 그래서 오민균은 처형되고, 동생은 맞아 죽었다는 얘기를 꺼내지 않은 것을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박정희는 눈을 감고 있었다.

그를 다시 훔쳐본 신관유는 꺼내지 말아야 할 말을 꺼냈다는 후회가 가슴을 쳤다.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 말을 주워담으려고 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그는 죽고 싶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차에서 뛰어내려 머리를 돌에 박살을 내버리고 싶었다.

군대 사정이라곤 잘 알지 못하는 단순한 이공학도 출신인 신관유로서는 서울 올라오는 내내 왜 박정희가 침묵을 지켰는지를 알지 못했다. 세 시간여 동안 한마디 말없이 무겁게 침묵을 지키고 있는 대통령을 보고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한 기분이었다. 대통령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서울로 돌아와서 사흘동안 병원에 누웠다. 입원한 병원에 정보요원들이 기웃거려 병원 사람들이 더 불안에 떨었다. 그후 신관유는 국회의원 공천에서 탈락했다. 몇 차례 재기를 시도했지만 실패하고, 끝내 조용히 정계에서 사라졌다.

하우스만 "한국놈이 일본놈보다 더 잔인했다"

1981년 여름, 오능균은 정보 분야에 종사하다가 옷을 벗은 벗 김을 통해 전두환을 움직이는 미국 정보통을 알고 있노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박정희를 암살하고, 뒤이어 전두환이 김재규 세력을 일망타진하고 중앙정보부를 장악하자 옷을 벗은 사람이었다. 김은 중앙정보부 시절 미국 정보통의 밀대로 활약했다. 오능균은 그가 현역시절 정보부원이란 것을 알지 못했다. 조그만 오퍼상으로만 알았는데 밀대로 활약했다는 것이다. 오와 김 두 사람은 다방에서 마주 앉았다.

"전두환이 레이건과 정상회담을 추진중인 거 몰라?"

광주를 쓸어버리고, 최규하를 협박해서 대통령직에서 쫓아내고, 체육관 선거를 통해 어거지로 대통령이 된 전두환은 미국의 승인을 받아 정통성을 확보하는 것이 당면 과제였다.

"그런 것도 있나?"

두 나라간의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발표되기 전이었다.

"그가 막후에서 전두환 장군을 돕고 있어. 오 사장, 그 사람 만나보고 싶지 않나?"

"만나고 싶지. 하지만 만날 수 있나?"

"가능해. 지금 미8군사령관 정보 고문으로 와있지. 제주 4.3, 여순사건, 숙군에 깊숙이 개입한 사람이야. 자네 큰 형님의 죽음과 둘째 형님의 죽음의 내막을 알고 있을지도 몰라. 이걸 매개로 한번 베팅하는 거야. 다른 친구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

오능균은 머리가 쭈볏 섰다. 두 형님 얘기라면 숨부터 칵 막혔다.

"두 형의 사건 내막을 알 수 있다고?"

"그렇지."

반세기 동안 암울하게 쪄눌러왔던 슬픈 가족사. 그로인해 큰 누님과 작은 누님이 6.25가 터지자 북으로 넘어가다 유탄을 맞고 작은 누님은 현장에서 죽고, 큰 누님은 행방불명이 되었다. 집안이 풍비박산이 된 가운데, 오민균ᐧ오보균 두 형은 집안에서 금기어였다. 오능균이 일곱 살 쯤 되었을 때, 청원 고향집으로 큰형의 뼛가루가 담긴 유골함이 온 것을 온 집안 사람들이 울면서 맞이한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이후 그에 대한 이야기는 어느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가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비밀에 가려졌다. 좌익이었다고 했지만 그것이 죽을만한 큰 범죄인지 몰랐다. 마을 사람들도 그것을 사실로 믿지 않았다. 모함이라고 받아들였다. 그러나 현실은 언제나 가위눌리듯이 살았다.

둘째 형은 뼛가루도 오지 않았다. 육사 5기 출신 열아홉살의 육군 소위로서 병적 기록도 뚜렷한데 그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이유로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지 못했다. 이렇게 죽은 사람들이 수 천, 수 만이 넘는다고 했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묻혀져야 할 이유는 될 수 없었다. 남원기지 사령부에서 오민균의 동생이라는 이유로 육군 정보국 수사대에 의해 맞아죽었다는 풍문이 떠돌았지만, 확인된 것은 없었다.

"그를 만나면 두 형님들 소식을 알 수 있다 이 말이야?"

"그런 것보다 앗싸리하게 사업이나 하나 도와달라고 해. 그의 실력은 막강하니까. 형과의 인연을 그렇게 활용해야지."

마침내 그와 만나기로 약속이 되었다. 용산 미8군사령부 기지 내의 레스또랑이었다.

그가 내민 명함 앞면에는 영문자로 이름이 새겨져있고, 뒷면에 한글로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오민균은 찬찬히 명함을 들여다 보며 속으로 "제임스 해리 하우스만"을 뇌었다. 그 이름자 이면에는 무언가 숙명적인 인연이 깔려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만나서 반갑소. 김과 친구 사이라니 더욱 반갑소. 김은 영원한 나의 친구요."

유창한 한국말이었다. 60대 중후반쯤 돼보이고, 이미 퇴역했지만 전두환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자 미8군사령관 정보 고문으로 부임해왔다는 것이다. 30수 년 동안 한국군 내에서 정보책임자로 근무했으니 미국은 그를 전두환 군사정권의 성격을 파악하고, 군 인맥을 살피는 정보 라인으로 활용하기 위해 임명한 것이었다.

하우스만은 1946년 미 육군 대위로 한국에 들어와 한국 군 인맥을 콘트롤했다. 대구 10,1항쟁, 대구 6연대 연쇄 반란, 제주 4.3, 여순사건의 배후 중심인물이었다. 굴곡진 한국 현대사를 디자인한 사실상의 설계자였다. 여러 대화 끝에 오민균이 정색을 했다.

"아저씨, 저는 처형당한 오민균의 친동생입니다."

그러자 그가 단박에 알아보고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큰 덩치에 과묵한 표정은 정보통 특유의 범접할 수 없는 어떤 카리스마가 있었다. 오민균이란 이름으로 그는 한 순간 지나간 세월을 추억하는 듯하다가 능숙한 한국말로 물었다.

"형님 일로 나를 찾은 것인가요?"

"두 가지 일 때문입니다. 우선 형님 일부터 알고 싶습니다. 백방으로 알아보려고 해도 아는 사람이 없고, 설사 안다고 해도 편린에 불과하고, 대개는 입을 닫고 있습니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이라는 뜻이다.

"사는 데 힘들었겠군."

그는 한국의 사회상도 정확하게 짚었다. 그런 일로 그를 찾았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사실 빨갱이 집안에 연루되어 무엇 하나를 할 수 없었다. 자유당 시절은 물론 박정희 군사정권, 지금 전두환 군사정권에 이르기까지 취업은커녕 장사를 하는데도 중요 길목에서 걸렸다. 건달로 사는 길밖에 없었다.

어느날, 고향인 재경 청원군 출신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사업하는 사람, 고위 공직자, 판검사 등 서울에서 출세했다는 인사들이 모처럼 자리를 함께 했다. 술잔이 오가고 모두가 거나해지자 현직 검사인 K가 갑자기 오능균을 향해 소리쳤다.

"오능균, 저 새끼는 왜 불렀나? 빨갱이 새끼를 말이야!"

순간 오능균은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아올랐다.

"당신 뭐라고 했소?"

오능균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주춤하던 K검사가 곧바로 고함을 질렀다.

"저런 싸가지 없는 새끼, 왜 니가 여기 왔나? 니놈이 올 자리냐? 당장 나가지 않겠거든 내 앞에 무릎 꿇으라. 빨갱이 새끼, 무릎 꿇어! 쳐넣기 전에!"

"뭐야?"

그대로 달려가 그의 두상을 박살내버리고 싶었다. 허우대 좋고 머리 좋고, 잘 생긴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건달로 지내면서 소소한 장사로 연명하는 일이었다. 그는 주먹이 있었다.

"오 사장, 아서. 제발 참아. 참아야 당신이 살아."

주변에서 일어나 뜯어말려서야 그는 자리를 박차고 휑하니 밖으로 나왔다. 어두운 밤길, 터벅터벅 걷는데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억울하고 분했다. 집안 내력으로 보면 한줌도 안되는 시시한 집안의 사람이 어찌어찌 고시에 합격해 떵떵거리는 것이 더욱 그를 비감에 젖게 했다. 그러나 분노는 자기 아픔만 덧낼 뿐이었다.

"왜 말이 없나. 어른이 돕겠다는 뜻 아닌가."

김이 말하자 상념에서 벗어난 오능균이 하우스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퉁명스럽게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결코 자기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모습이었다. 오능균은 마음이 복잡해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하우스만이 물었다.

"정치를 하고 싶은가요?"

오능균은 그때 30대 후반이었다. 김이 거들었다.

"고문관께서 돕겠다고 하시는군. 정치를 하겠다고 하면 적극 도우실 거야."

"돈을 벌고 싶습니다."

권력의 곁에 가면 불에 덴다. 생사를 알 수 없는 곳이다, 절대로 기웃거리지 마라, 정치와 군대는 곁불도 쬐지 말라.... 선친으로부터 듣는 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오능균은 라오스에 수력발전소를 건설하는 사업을 맡았다. 발전소 건설에 정신없이 지내는 사이 십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

어느날, 본국으로 돌아간 하우스만이 서울에 나타나 오능균을 찾았다. 1996년도 초여름이었다. 남산 하얏트 호텔, 그가 묵고 있는 숙소로 가려고 준비중인데 이종 조카 이성록이 찾아왔다.

"아저씨, 하우스만을 만나기로 했다면서요?"

"응, 십몇 년만에 연락이 왔구나."

"저 데려가줘요. 꼭 만나보고 싶습니다."

이성록은 현대사를 전공하는 젊은 사학도였다. 해방공간의 한국정치사를 연구하고, 박사학위를 받더니 괄목할만한 논문을 계속 발표해 학계에 신선한 바람을 몰고온 대학 강사였다. 두 사람은 하얏트 호텔로 갔다.

"미스터 오, 꼭 만나고 싶었소."

하우스만은 노쇠해있었고, 큰 덩치에 어깨가 굽고, 주름 투성이의 얼굴이어서 어떻게 이런 사람이 한국 군대와 정치계를 주물렀는지 실감이 가지 않았다. 하긴 그는 지금 90을 바라보는 나이다. 십수년 전 상대방을 내리깔 듯이 경계하며 내려다보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그게 편했다. 이성록이 그에게 물었다.

"오민균 소령이 제 할아버지 뻘입니다. 그의 죽음이 베일에 가려져 있습니다. 재판 기록을 살피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왜 그런가?"

"지극히 형식적입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종결짓는 문서 치고는 너무도 허술합니다. 하우스만 할아버지가 오 소령 처형 장면을 찍은 사진이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보관하고 계십니까."

그가 담담히 말했다.

"나의 모든 자료는 미 국방부 문서기록관에 넘겼지."

"해방 공간에서 좌우익 사냥은 너와 나를 가르고, 국민과 비국민을 결정하는 잣대가 되고, 이것이 오늘까지 내려온 사회 대립의 흉기가 되었습니다. 동의하십니까?"

상당히 되바라진 질문이었다. 그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담담히 받았다.

"소개 받기로는 연구원이라고 했는데, 이건 연구자로서 취할 태도가 아니군."

"저는 연구자로서 온 것이 아니라 오민균 할아버지의 손자 자격으로 왔습니다."

"아서, 그렇게 말하면 안돼."

오능균이 제지했다. 그러나 이성록도 기왕에 나온 김에 마저 말하겠다는 듯이 나섰다.

"해방공간을 디자인한 미국인이기 때문에 제 개인적으로라도 묻고 싶었습니다. 하우스만 씨는 여순사건 진압작전을 주도한 인물이고, 숙군의 설계자였습니다. 선한 미국인도 있지만 민간인 학살을 사주하고, 대립과 분열과 증오와 저주를 심은 사람도 있습니다."

"나를 향한 공격인가? 한국 사람이 이렇게 건방진 경우가 있는가?"

하우스만의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추억을 더듬고자 찾은 것이 여지없이 뭉개지자 그는 오능균과의 만남을 후회하고 있었다. 마지막 추억여행이 엉망이 되는 것 같았다.

"제가 자료를 찾아보고 왔습니다. 하우스만 씨의 고향에서조차 하우스만 씨가 무슨 일을 한 사람인지 알지 못하더군요. 비밀주의로 일생을 살아온 사람이란 뜻이겠죠. 그런데 그 비밀주의가 인류를 위해 사용되었습니까. 한반도 평화를 위해 기여했습니까? 저는 하우스만 씨를 추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았습니다. 국내 정치가나 장성들도 잘 모르거나, 알더라도 쉬쉬 했습니다. 떳떳하지 못한 일을 해서 그런 것 아닌가요?"

"나는 내 임무에 충실했고,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 의무를 다한 미국인일세. 대한민국 건군의 초석을 다져준 사람이야. 장성들은 날더러 건군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한반도는 공산화되었을 것이야."

"하우스만 씨는 남한 내부에서 혼란을 야기한 집단이 공산 세력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 있습니까. 미국에도 흑백 분규가 있습니다. 흑백 분규가 총질로 해결됩니까? 색깔이 다르면 범법자입니까? 생각이 다르면 죽입니까?"

이성록의 공격적인 말에 그가 허공만을 바라보았다. 한국이 변해도 너무 변했구나. 이런 경우가 단 한번이라도 있었던가. 한참만에 그가 천천히 말했다.

"이상한 일이군. 내가 눈짓만 해도 그들은 알아서 착착 순종했는데, 젊은이는 다르군."

"건방졌다면 이해해 주십시오. 그 안엔 항의가 들어있습니다."

"신기한 일이야. 대한민국 상층부가 다 그랬는데 말이야. 종속적이어서 내 하고 싶은대로 했지. 그것을 그들이 더 잘 알 것이야."

하우스만은 돌아보았다. 모두가 그의 하수인이었다. 순종에 익숙해 있었고, 심부름꾼이 된 것을 영광으로 알았다. 미국이 생각하고 미국이 가르치고, 미국이 지시한대로 선택받은 자의 영광으로 알고 기쁘게 일했다. 미국인보다 더 미국인으로 살았다. 그런데 이 젊은이는?

"젊은이, 우리가 한국을 위해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를 모르겠는가. 고마움을 알아야지."

"잘살게 해주었다고 노예로 생각하면 안됩니다. 상호 동등할수록 미국의 지위와 가치가 올라간다는 진리를 모릅니까?"

"이익 앞에서는 동족도 친구도, 민족도 없는 사람들인데 특이하군. 공산주의자들을 미워하는 것은 내 신념이지만, 한국의 지도층은 달랐어. 한 사람을 치라는데 오십명 백명씩 목을 가져오더군. 제주도 탈영 병사 21명 중 주모자만 색출하라고 했는데 모조리 죽여버렸어. 이 문제가 미 국방성에 보고되었지. 내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200명-300명도 끄떡없이 학살했는데, 20명 가지고 왜 문제 삼느냐고 항의해서 무마시켰네."

"그것이 정당하다는 것입니까."

"물론 잘못한 것이 있었다네. 젊은이, 내 말 똑똑히 듣게. 나는 한국을 보면 슬픔을 많이 느끼지. 절망적인 때가 많았어. 일본인보다 더한 야비하고 잔인한 사람들이었으니까.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더 잔인했다니까(brutal bastards, worse than Japanese)."

이 말은 그가 1987년 영국 테임즈 텔레비젼과의 인터뷰에서 카메라가 꺼진 뒤 털어놓았던 말이다. 어쩌면 그의 진정한 말은 이것이었을지 모른다. 그가 말을 이었다.

"여순사건 때 토벌군들이 왜 토벌에 소극적이었는지를 그땐 몰랐지.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네. 그땐 내가 젊었지 않은가."

그것이 변명처럼 들리지는 않았다. 마지막 떠나는 자의 회한일지도 모른다.

"오민균 소령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한테 물을 것이 못돼. 그들이 잔혹하게 몰아갔어. 모든 게 그랬어. 나도 당황한 때가 있었지."

"그래서 야비하다는 것입니까?"

계속 따지듯이 묻자 오능균이 화를 내며 막았다.

"버릇없이 그게 뭔가. 추억을 더듬으러 오신 손님에게 그건 예의가 아니야. 나가자. 하우스만 선생님, 이거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오능균이 정중히 사과하고, 이성록의 팔을 잡아끌어 서둘러 룸을 나왔다. 하우스만이 그의 등 뒤에 대고 낮게 말했다.

"오사장, 라오스 수력발전소 일이 잘 진척되지 못했더군. 밥 좀 먹으라고 도운 건데,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 안타까웠소."

그는 귀국한 몇 달 후인 1996년 가을 8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텍사스의 한 군인 묘지에 묻혔다. 그가 한국을 마지막으로 방문한 것은 꼭 추억만을 더듬는 것이었을까를 오능균은 가끔씩 반추했다.

생명의 바다

창밖으로 바다가 보였다. 저녁 어스름의 바다는 노을을 받아 붉게 일렁였다. 마치 붉은 비단이 깔려서 흔들리는 것 같았다. 도시는 평화로웠다. 일년 내내 온화한 기후가 누구나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고 있었다.

강태실은 한국 사람들을 종종 마주칠 수 있어서 좋았다. 외국인 거주자 중 중국인이 가장 많지만 한국인도 적지 않았다. 2차 대전이 끝나고 상하이, 쿤밍, 충칭, 광저우에서 흘러들어온 교민들이었다. 시장엔 제주 여인들도 더러 있었다. 제주도 사람들의 강한 생활력을 재래시장의 어물전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밀선을 타고 오는 도중 둘째 아이를 잃었다. 심한 멀미와 복통과 설사를 못이기고 아이는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큰 아이는 씩씩하게 자랐다. 자면서 가끔씩 깜짝깜짝 놀라는 것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무탈하게 자랐다. 아이는 아빠를 닮은 그대로였다.

진미호에 짐짝처럼 실려서 험한 파도를 넘을 때는 죽는 줄 알았다. 배 밑창 선실에서 시체처럼 누웠다가 상륙해보니 후쿠오카였다. 어제 일 같은데 벌써 두 해를 넘겼다. 그곳에서 몸을 추스린 다음 홍콩행 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동양의 영국이라고 해서 고른 선택지였다. 구룡반도의 한가한 바닷가 기슭은 제주도와 너무도 흡사했다. 꼭 고향에 온 기분이었다.

강태실은 오늘 특별히 만찬을 준비했다. 현호영이 다음날 런던으로 떠나는 날이다. 일년 가까이 함께 지냈지만 그녀를 떠나보내려고 하니 눈물부터 앞섰다. 남편을 생각하면 견딜 수 없는 죄책감과 그리움이 쌓였다. 현호영을 보면 그의 오빠를 보는 느낌이다. 때로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아프고 괴롭다.

시누이가 좋아하는 전북죽을 쑤고, 초고추장에 찍어먹을 멍게와 해삼을 먹기 좋게 만들어 상에 올렸다. 모처럼 제주도 맛을 보여주고 싶었다. 런던에 가서도 제주도 맛을 잊지 않도록 해주고 싶었다.

오신애가 들어섰다. 모처럼 불렀더니 집으로 달려온 것이다.

어느새 항구의 불빛들이 다정하게 바다 위에 떠서 잔잔한 물결 따라 흔들렸다.

"어머, 식탁이 해물로 가득하네. 제주식 푸드는 생선 다루는 법, 조미료를 잘 첨가해야 하는데 언니는 벌써 조리사가 다 된 거 같아."

"이런 건 기본 아니에요?"

그들은 식탁에 둘러앉았다.

"호영씬 짐 다 쌌어요?"

오신애가 묻자 현호영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건드리기만 하면 금방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함께 있고 싶은데 올케는 호영을 한사코 영국으로 떠나보낼 수속을 밟았다. 넓은 곳으로 가. 사람 사는 곳으로 가. 보다 안전한 곳에서 아이를 키우도록 해. 그것이 아픔을 잊는 길이야, 라고 올케 언니는 말했다.

"내가 곁에 있으니까 호영씬 아무 걱정 말고 떠나요. 난 언니와 연애하며 살 거야. 아이를 멋드러지게 키우면서 살 거야. 한국의 통일 전사로 키울 거야. 통일시켜서 아빠의 고향에 보낼 거야. 아빠의 고향이 평양이란 거 알고 있지?"

오신애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이 환히 웃어보였다. 그녀는 남자 아이를 갖고 있었다. 홍콩 교외에서 숙박업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었다. 제주에서 충분히 돈을 가져왔다. 사진봉이 미래를 대비해 마련해준 돈이었다.

"사케도 한잔 해요. 삼학 청주. 홍콩에도 삼학 청주가 다 있네요."

"삼학 하면 '목포의 눈물'이지."

"그래요. 우리 실컷 이 노래 불러요."

강태실이 간장 종지 같은 잔 세개에 청주를 각기 따랐다. 그녀가 한잔씩 각자 앞에 배분했다.

"자, 그럼 우리 앞날을 위해 간빠이!"

"일본 말 정말 싫다."

오신애가 눈을 흘기며 웃었다.

"그래두 일본말은 익혀야지. 그 새끼들 이기려면 더 잘 알아야 돼."

"좋은 말."

세 사람이 다시 똑같이 눈높이로 잔을 들어올려서 맞딱뜨리며 입으로 가져갔다. 부드럽고 달콤한 맛이 목을 타고 내려갔다.

오신애가 먼저 노래를 부르자 두 사람이 따라불렀다. 제주와 목포를 오가는 연락선이 항구를 출항할 때나 입항할 때 들려오는 노랫소리. 어렸을 적부터 귀에 익고, 가슴 속으로 파고들던 슬프고도 애절한 노래. 그것은 알게 모르게 그들 내면의 일부가 되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며

삼학도 파도깊이 숨어드는데

부두의 새 아씨 아롱 젖은 옷자락

이별의 눈물이냐 목포의 설움

1절이 끝나자 강태실이 "난 2절이 더 애절해" 하며 2절을 부르자 두 사람이 따라 부르며 3절까지 이어갔다.

삼백년 원한품은 노적봉 밑에

임 자취 완연하다 애달픈 정조

유달산 바람도 영산강을 안으니

임 그려 우는 마음 목포의 노래

깊은 밤 조각달은 흘러가는데

어찌타 옛 상처가 새로워진가

못 오는 임이면 이 마음도 보낼 것을

항구에 맺은 절개 목포의 사랑

노래를 마치고 그들은 한바탕 실컷 울었다. 소리내어 울고 난 뒤 자신들을 수습했다. 정말 요란하게 울고 나자 속이 후련한 것 같았다. 이제는 여유있게 웃었다.

"언니 집이 깨끗해서 좋아요. 이 집 언제 수리했나요? 나두 곧 인수한 건물을 수리해야 하는데..."

"애 키우랴, 사업 벌이랴, 바쁘네."

"바빠야죠. 제주 여자는 서있으면 넘어지잖아요. 자전거처럼..."

"그래요. 맞아요. 우리집 예쁘죠? 전망이 좋죠? 바다가 보이고, 등대가 보이고, 호영씬 어느때는 종일 저기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죠. 아이도 내팽개친 채 말예요. 딸아이라서 그런가?"

"딸이 어때서. 영국의 앤 공주 봐."

강태실은 이곳에 도착하자 1층에 조그만 상가 세 개가 딸리고 2층에 살림집이 차려진 건물을 사들였다. 가게 둘을 세로 내주었지만 호영을 보내면 화장품 가게를 하나 낼 계획으로 있다.

"이 건물 수리한 인부한테 들은 이야긴데, 놀랐어요."

강태실이 몸을 가볍게 흔들더니 웃었다.

"뭔데요?"

"건물 지붕을 헐어내던 인부들이 지붕 서까래에서 못에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도마뱀 한 마리를 발견했대요."

"그래서요?"

그래서 놀란 인부들이 집주인에게 다가가 이 집 언제 수리했냐고 물었더니 2년 전에 지붕을 갈았노라고 했다. 인부들은 2년 전에 박은 못에 박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도마뱀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더 놀라운 사실은 다른 도마뱀 한 마리가 끊임없이 먹이를 물어다 주는 광경이었다. 그 도마뱀은 2년이란 세월 동안 못에 박힌 친구를 위해 하루에도 몇 번씩 먹이를 물어다 준 것이었다.

"우리도 친구에 관한 얘기를 많이 하죠? 평생 세 명의 친구를 갖고 있으면 그 인생은 성공했다느니, 친구란 누구도 내 편이 되어주지 않는 세상에 내 슬픔을 대신 등에 지고 가는 사람이라느니, 또는 사회에서 만난 가족이라느니..."

"그래요. 친구란 세상이 만들어준 가족이에요."

오신애가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지난날을 돌이켜보면 그런 적이 없는 것 같아. 때로 잠못 이루며 괴로워하고 있을 때 과연 찾아가 속엣말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있는가, 함께 아픔을 나눌 친구가 있던가, 솔직히 없었던 것 같아요. 물론 시도해보지 않았지만요. 시도해보나마나 안되리라는 것, 오히려 약점만 잡히고 기피인물이 될 것이란 걱정 때문에 포기했다고 봐야죠."

"그래요. 약점 잡히기 싫어서 속엣말 내놓지 않죠. 우리 아빠처럼."

"아빠란 누구? 사진봉 단장?"

오신애는 웃는 얼굴로 대답을 대신했다. 강태실이 결론 삼아 말했다.

"하지만 우린 영원한 친구예요. 어디에 있건 간에. 우린 모두 상처받고 왔지만 이겨낸 친구들이에요. 두 사람은 내 슬픔을 대신 등에 져주는 친구가 됐어요. 영원한 가족이에요."

그러자 현호영이 받았다.

"올케 언니, 내 영원한 친구는 여기 있어요."

그녀가 바닥에 누워 자고 있는 아이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또 신랑 자랑하려는군요. 그래요, 자랑하세요. 오 소령, 얼마나 멋있는 장교였나요. 태실 언니는 일찍 떠나서 잘 모를 거예요. 늠름하고 지적이고 잘 생기고... 헌데 아이는 호영일 많이 닮았네? 여자 아이니까 더 다행이야."

오신애가 거들고 덧붙였다.

"사진봉 단장도 훌륭한 걸 알겠죠? 우리 저 늠름한 아일 보면?"

아이 역시 누워서 천장을 우러르며 손을 까작거리고 있었다. 호영이 그녀 말을 묵살하고 말했다.

"한시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꿈꾸지 않은 때가 없어요."

그러면서 현호영이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마음을 굳게 먹기로 다짐했지만 그를 생각하면 눈물부터 앞섰다. 그녀는 며칠 전 그가 처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총살형이 집행되었다고 했다. 아무도 없는 광야에서 쓸쓸하게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 그를 생각하면 그녀는 견딜 수가 없었다. 스물세 살 청춘의 종말. 그가 무슨 큰 범죄를 저질렀기에, 그 나이에 무슨 엄청난 음모를 꾸몄기에, 그가 꿈꾼 세상이 얼마나 두려웠기에 세상은 그렇게 가혹했나... 그녀는 그의 유골을 찾아서 한라산에 묻을 결심을 했으나 무서워서 모든 생각을 지웠다. 엄마가 어떻게든 핏줄을 이어야 한다고, 공포스런 한국을 떠나야 한다고 쫓아내보낼 때 허겁지겁 밀선을 탔었다. 그 이후 사선을 넘나드는 행로. 생각할수록 괴롭고 서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힘내요 아씨. 그는 죽지 않았어. 그가 여기 살아 있잖아."

강태실이 다가와 현호영의 아이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그러나 울지 않겠다고 해도 그를 생각하면 온 몸이 저리도록 그립고 아팠다. 푸른 바다를 함께 바라보며, 한라산의 장엄한 자태를 함께 우러르며, 함께 바닷가를 거닐며, 보육원을 찾아 아이들에게 구호품을 나눠주며 그와 함께 한 시간들, 사물을 보는 따뜻한 시선에 마음으로부터 지지를 보냈던 시간들.... 이런 잔영들이 떠오르면 그가 사무쳐서 견딜 수가 없었다.

"우리 굳세게 살아요.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다고 그이가 말했다고 했잖아요."

강태실이 현호영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래요, 호영씨, 나한테도 사 단장이 있어요. 절대로 그이 죽지 않았어요. 절대로."

오신애가 호영을 일으켜 세워 창가로 갔다. 강태실이 뒤따르며 함께 창밖을 내다보았다. 멀리 등댓불이 일정한 간격으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때마다 빛이 긴 꼬리를 물고 바닷물에 와닿아 주름을 잡으며 흔들렸다.

"저 거친 바다를 지키는 등대, 바로 그이들이에요. 그 아이들이 자라고 있잖아요."

강태실이 나지막하나 또렷하게 말했다. 그녀가 노래를 흥얼거리자 오신애가 자연스럽게 따라불렀다. 해녀들이 바다에서 노를 저을 때나 물 속에 잠길 때, 서로 매기고 받으며 부르는 힘찬 노래. 그들은 어느새 거친 바다로 나가는 굳센 해녀가 되었다.

이여도사나 이여도사나 이여도사나 이여도사나

요 넬 젓엉/요 넬 젓엉

어딜 가코/어딜 가리

진도 바당/진도 바당

홀로 나가자/홀로 나가자

이여도사나/이여도사나

이여도사나/요 노동이

이여도사나/무엇을 먹고

이물에는/이여도사나(이물에는)

이 사공아/이여도사나(이 사공아)

고물에는/이여도사나

도사공아/이여도사나

허릿대 밑에/허릿대 밑에

화장아야/화장아야

물때 점점, 어어/물때 점점

늦어나진다, 힛/늦어나진다

저어라 저어/저어라 저라

이여라 배겨라, 힛/이여라 와겨라

쿵쿵 찧어라, 힛/쿵쿵 찧어라

저어라 저어/저어라 저어라

우리 선관/우리 선관

가는 딀랑/가는 딀랑(이여도사나)

미역 좋은/이여도사나

여끝을로/이여도사나

전복 좋은/전복 좋은

저 머들로, 힛/저 머들로

설이나 설설/설이나 설설

인도나서/인도나서

이여도사나/이여도사나

이여도사나, 힛/이여도사나

저어라 저어/저어라 저어

찧어라 배겨라, 힛/찧어라 와(배)겨라

쿵쿵 찧어라, 힛/쿵쿵 찧어라

저어라 저어/저어라 저어

요 네 착이/요 네 착이

부러나진다/부러나진다

한라산에/한라산에(이여도사나)

곧은 남이/곧은 남이(이여도사나)

없을소냐/없을소냐

요 밴드레/요 밴드레(이여도사나)

그쳐나진다/그쳐나진다(이여도사나)

서늘곶이/서늘곶이(이여도사나)

머의 정당/머의 정당(이여도사나)

없을손가/없을소냐(이여도사나)

이여도사나/이여도사나

마지막회 <끝>

기자 : 이계홍 작가,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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