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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2 (수)

[일사일언] 친절하지 않을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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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진송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저자


유난히 택시에서 불쾌한 일을 많이 겪었다. 대화는 아차 하는 사이 성희롱으로 번지고 복잡한 길을 갈 때는 승강이를 벌였다. 가는 길을 설명하는 나에게 "이제 여기서 안 내릴 건데 뭘 가르쳐 줘"라고 말하는 택시 기사를 만났을 땐 대낮인데도 달리는 택시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어느 날 나와 함께 택시를 탄 친구가 혀를 찼다. "이제 알겠다. 네가 너무 친절하네." 명랑하고 싹싹하게 인사하는 내 태도가 문제라고? 나는 일종의 실험 데이터를 뽑는 마음으로, 목소리를 낮게 깔고 웃지 않으며 택시를 탔다. 극적일 정도로 나쁜 경험이 줄어들었다.

물론 성희롱이나 여자 승객을 깔보는 폭력적 태도는 내 탓이 아니다. 나를 괴롭힌 사람은 만만하다고 여기는 다른 대상에게 같은 짓을 할 것이다. 어디까지나 가해자 잘못이니 나의 대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택시뿐 아니다. 도처에서 상대의 친절과 취약함을 노리는 이가 나타난다. 길을 가르쳐 주다가, 휴대폰 조작을 도와달라고 해서 들여다보다가, 자리를 양보했다가 마음이 상한다. 나는 잘 웃고, 스몰 토크에 재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장점이 나를 위험으로 몰고 간다는 것을 알고부터 수도꼭지처럼 친절을 잠가야 했다.

웃지 않는 여자를 괘씸해하고, 개미 눈물만 한 권력이라도 생기면 '갑질'을 하고 싶어 하는 세상에서 미소와 친절은 강요되는 덕목이다. 사실 내 싹싹함은 건방진 어린이에게 꾸준히 보복한 어른들 때문에 습득한 후천적 생존 기술이기도 하다. 이제는 필요할 때 적절하게 나를 보호하는 갑옷을 두를 줄 안다.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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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친절해지고 싶다. 친절하지 않을 자유와 동시에 친절할 자유를 원한다. 누구나 원하지 않을 때 단호하고, 원할 때 친절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은 늘 이것을 뒤집어 놓아서 억지로 웃어야 하고, 경계하며 야멸차게 굴지만. 타인의 친절을 착취하지 않으며, 두려움 없이 한껏 다정하고 말랑하게 살고 싶다.



[이진송 '오늘은 운동하러 가야 하는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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