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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8 (화)

심마니 할배는 삼을, 스물다섯 사진가는 삶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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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진 사진가, 신작전에서

33년 전 울릉도 다큐 촬영 회고

특유 물성에 프린팅 결합한

‘보이스’ 연작 등 20여점 선봬

“30여년 대자연·사막 기행 작업은

그때 경험으로 기른 배포·기백 덕“


한겨레

“33년 전 울릉도 알봉분지의 눈밭 속 캄캄한 집에서 심마니 채씨 할아버지를 처음 만났죠. 그 뒤 1년간 그를 졸졸 따라다니며 겪은 숱한 경험이 제가 사진가로 일어서게 된 기반이 됐습니다.”

15일 서울 삼청동 피케이엠 갤러리에서 신작전을 여는 재미 사진작가 이정진(59)씨는 뜻밖의 옛이야기들을 주섬주섬 풀어놓았다.

지난 1987년 1월21일이다. 설경 사진을 찍으러 울릉도 성인봉 아래 알봉분지를 찾은 스물다섯 새내기 사진가 이정진은 겁먹은 표정으로 방황하고 있었다. 어느 순간, 새하얀 설원 말고 보이는 게 없었다.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매며 인가를 찾았다. 멀리 눈밭 위로 얼핏 꼬물꼬물 연기가 솟았다.

눈밭 속 동굴처럼 자리 잡은 집에서 나오는 연기였다. 통나무 기둥 사이 흙을 바르고 풀을 지어 올린 투막집. 인기척을 느낀 할머니가 뛰어나왔다. “오랜만에 사람을 본다”면서 손을 맞잡았다. 어두컴컴한 집 안에는 머리와 수염이 산신령처럼 허연 할아버지가 무표정하게 앉아 있었다. 염소 세 마리와 고양이, 소 세 마리가 식구로 같이 살고 있었다. 노인은 원래 경북 상주에서 농사를 짓다가, 돌연 산삼을 캐야겠다는 발심을 하고, 9년째 울릉도를 누비고 있다고 했다. 한나절을 그이들과 지낸 이정진은 직감했다. 앞으로 1년여 동안 알봉분지의 두 어르신을 따라다니며 그들의 삶을 찍을 수밖에 없단 것을. 이날 일기에 작가는 적었다. “어떤 노인들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정신없이 사진을 찍으면서 자연과 가장 가까운 삶이 바로 이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이 스쳤다…나는 두 노인의 삶에 더 가까이 접근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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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작한 울릉도 심마니 다큐 사진은 다섯 차례의 방문과 촬영 작업으로 이어졌지만, 가시밭길 투성이였다. 포항에서 편도로 8시간이 걸리는 울릉도행 배편은 기상 사정으로 결항하기 일쑤였다. 도동항에 도착해도 알봉 분지로 가는 입구인 천부까지 다시 배를 타야 했다. 게다가 심마니 노인은 “삼 캘 때 여자가 오면 부정 탄다“면서 처음엔 아예 작가를 따라오지도 못하게 했다. 지극정성으로 얼굴 사진을 찍어서 선물하고, 집안일도 도우면서 말을 트자 겨우 동행을 허락했다. 축지법 쓰듯 신출귀몰하게 산 속을 이동하는 그를 놓쳐 길을 잃고 숙소로 돌아온 적도 여러 번이다. 투막집에서 묵을 때는 작가의 얼굴 위를 생쥐가 뛰어다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수많은 곡절 속에 그들의 작업과 살림살이를 앵글에 담았고, 87년 12월29일, 결국 고대하던 삼을 캐지 못하고 고향 상주로 내외가 떠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이정진의 첫 다큐 작업은 마무리됐다. 그리고 이듬해 열화당에서 <먼 섬, 외딴 집>이란 첫 사진집을 출간하며 그는 프로 사진가로서 첫 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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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진집 <먼 섬…>은 이정진의 이력에서 중요한 구실을 했다. 심마니의 일상을 담은 책의 가치를 인정받아 그는 미국 뉴욕대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 거장 로버트 프랭크가 책에 관심을 보이면서 그의 제자로 입문할 수 있었다.

사실 미국행 이후 작가의 이력은 사진집 <먼 섬…>의 리얼리즘 다큐 사진과는 크게 다른 궤적을 걸었다. 한지 위에 감광 도료를 바르고, 풍경과 사물을 인화해 수묵화 같은 불명확한 선과 질감을 빚는 주관적 감성의 사진을 창안했다. 이번 전시에 처음 선보이는 신작 <보이스>연작과 <오프닝>연작 20여점도 그 연장선 상이다. 특유의 물성과 명상적 요소를 강조한 작업에 디지털 프린팅 방식을 실험적으로 결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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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33년 전 험난했던 울릉도 다큐 작업이 주는 의미는 다른 맥락에서 작가에게 여전히 소중하다고 했다. 미국과 캐나다의 대자연, 사막을 기행하며 찍은 지난 30여년 간의 미국 기행 작업을 할 수 있게 한 배포와 기백을 주었기 때문이란다. 그는 묵은 필름을 정리해 절판된 사진집 <먼 섬…>의 재출간을 꿈꾸고 있다. 3월5일까지. 글· 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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