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은 시간 아닌 체험
‘토닥이는 손’ 없는 아기
건강하게 자랄 수 없듯
육아, 사랑이 이룩한 성장
이혁진 소설가 |
소설을 쓰면서 배운 것 중 하나는 시간이 시계나 달력의 숫자가 아니라 ‘사건’에 따라 흐른다는 것이다. 시간상의 공백을 메우기 위한 것일 뿐 줄거리와 무관한 사건을 쓰면 이야기는 축축 처지고 늘어진다. 반면 줄거리를 중심으로 쫀쫀하게 짜인 사건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줄거리를 다양한 관점에서 음미할 수 있게 해주고 인물의 깊은 곳까지 탐색할 수 있는 통로가 생겨 궁극적으로는 ‘소설적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 시간 감각을 뛰어넘어, 이를테면 세 시간의 일에 대해 쓴 900페이지짜리 소설을 정신없이 읽고 났을 때처럼, 이야기 속 인물의 경험을 현실 속 우리의 경험보다 더 농밀하고 체계적으로, 완전하게 체험하는 순간이 일어나는 것이다. 영화감독 앨프레드 히치콕의 유명한 말 “영화란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인생”이라는 정의도 이런 맥락이다. 우리는 시계와 달력에 따라 살아가지만, 그것들은 기실 눈금에 불과하다. 우리가 인생을 체험하고 실감하는 것은 ‘사건’을 통해서다.
성장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일을 어떻게 겪고, 그것으로 체험하고 실감하는 인생이라는 것이 얼마나 두터워졌는지가 곧 성장이다. 그렇다면 뒤집어서, 성장하기 위해 어떤 일을 어떻게 겪어야 할까? 많은 소설이나 영화가 독특한 사건을 다룬다. 눈을 떠보니 벌레가 돼 있었다거나 멀쩡한 밤하늘에서 개구리 비가 쏟아지는. 하지만 유별난 사건을 다룬 모든 작품이 의미 있거나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방점은 ‘어떻게’라는, 목표나 결과가 아닌,과정에 찍혀 있다.
예컨대 입학과 졸업, 입대와 제대, 입사와 퇴사, 이직에 결혼까지 모두 옆에서 지켜본 친구들이 문득 나보다 더 성장했다고 느끼게 된 것은 그 친구들이 육아를 경험한 뒤부터다. 이전의 여러 사건과 달리 육아는 부단하고 극단적인 과정이다. 목표는 있지만 열에 여덟아홉은 그 목표대로 못 갈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더더욱 알 수 없다. 자신의 진로나 일에 관해서라면 ‘세상에 맙소사’ 하며 상상도 못 할 일이다. 하지만 모두 열심히 하고들 있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진로나 일을 수정하기까지 한다. 이유는 자명하다. 좋아하니까, 책임져야 하니까. 더 솔직히 말하면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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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들을 보면 사랑이라는 말은 민망하지 않다. 오히려 손끝으로 매만질 수 있을 만큼 선명하다. 어른들은 사료를 먹고도 살 수 있지만 아기들은 그럴 수 없다. 분유를 타주는 손, 이유식을 먹여주는 손, 안아 올려 트림하도록 토닥여 주는 손, 바게트처럼 통통한 등을 씻겨주고 막 유치가 나기 시작한 잇몸을 안까지 긁어주고 닦아주는 손이 없다면 아기들은 건강히 자랄 수 없다. 오직 수많은 손길로만 아기들은 살 수 있고 그 손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명백히 사랑이다. 목표도 불확실하고 결과도 전혀 모르지만 매일 그렇게 손을 더해가며 키우는 것을 사랑 말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순조롭지조차 않다. 모르는 것, 처음 하는 것 투성이라 마음부터 지치고 힘들다. 몸이 못 버텨 아프거나 아차 하는 순간에 다치는 일도 숱하다. 하지만 그럴 때조차 그 아프거나 다친 사람이 자신이라서, 아기나 아기 때문에 더 고생하는 아내가 아니라서 다행이고 괜찮다는 생각을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하게 된다. 자기밖에 모르고 뜻대로 안 되면 어렸을 때는 앵앵 울기나 하고 나이 먹어서는 애꿎은 데다 화풀이나 하던 수컷 종자에서 어엿한 사람으로, 성숙한 남자로 성장한 것이다.
사랑이라는 주제에 속한 일련의 사건들을 낱낱이 겪으면서 우리는 성장한다. 다른 인간관계나 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수많은 손길을 필요로 하되 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키는 것도, 어떤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라면, 단지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스스로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다. 자신의 성장을 선택했고 감수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것을 어리석다고 여긴다. 흔히 이용당하고 쉽게 멸시당한다. 헌신과 희생에 가까운 막대한 노력보다 자산 규모나 사회적 지위가 더 높은 평가와 찬사를 받는다. 하지만 그것을 현실이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거짓과 악이라고 부르고 싶다. 간결하고 명료하게, 그리고 이야기의 인물들이 끝까지 싸워서 결국 이겨내고야 마는.
이혁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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