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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1 (토)

"사형 선고에 만세 高唱"… 日 통제에도 박열 재판 현장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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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과 사건으로 본 조선일보 100년] [5] 항일 보도 앞장선 이석 기자

日 히로히토 왕세자 암살 계획해 사형 선고 받은 독립운동가 박열

일제는 공판 보도 통제했지만 본지는 1930년까지 70차례 보도

"박열의 기개에 재판장도 당황" 생생한 법정 스케치를 보내

조선일보

당시 공판을 보도한 이석 기자.


"어이 재판장. 내 육체는 자네들 마음대로 죽일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은 어찌할 수 있겠는가."

2017년 관객 235만명을 동원했던 영화 '박열'. 일본 히로히토 왕세자 암살을 계획한 혐의로 1926년 사형 선고를 받은 독립운동가 박열(朴烈·1902~1974)의 삶을 극화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박열(이제훈)은 법정에서 이렇게 외친다. 그의 사상적 동지이자 '옥중 부부'가 된 가네코 후미코(최희서)도 사형 선고를 받고서 '만세!'를 부른다. 1923년 관동대지진 이후 일본인들의 심각한 민심 이반에 직면한 일제가 조선인에게 책임을 떠넘기기 위해 박열 사건을 조작했다는 분석도 있다.

영화 '박열'의 법정 장면은 1926년 3월 26일 자 조선일보 보도에 바탕을 두고 있다. 당시 일본 신문들은 '박열이 일본 재판장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왜곡 보도했다. 반면 조선일보는 사형 선고를 받은 박열이 '판결을 듣고서 돌연 만세를 고창(高唱)'이라고 전했다. 영화에서도 박열의 동지들은 일본 신문의 편파 보도에 분통을 터뜨리지만 조선일보 보도에는 "조선 신문에도 기사가 났다"며 반가워한다. "조선일보만 만세를 불렀다고 지대로 쓴겨"라고 기뻐하는 장면도 나온다.

조선일보는 1930년까지 박열의 소식을 70여 차례 전했다. 일본 현지에서 박열 사건을 취재한 것은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생활을 하다가 1925년 도쿄로 유학을 떠난 이석이었다. 이석은 1924년 11월 황해도 재령에서 동양척식회사의 수탈에 반발한 소작인들의 농성 현장에 특파되는 등 항일 보도에 앞장섰다. 일본에서 박열 공판 사건을 취재한 그는 1926년 3월 4일 자에 '특별 방청석에 동포라고는 본사 특파원 하나뿐'이라며 '박열은 장내를 돌아보다가 묵묵히 목례를 보냈다'고 전했다.

조선일보

1920년대 일본 왕세자 암살을 계획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독립운동가 박열의 삶을 그린 영화 ‘박열’(이제훈·사진 위). 아래 사진은 당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지면 왼쪽 )가 판결을 듣고 ‘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다고 보도한 1926년 3월 26일 자 조선일보 기사. /메가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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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 공판에 대한 일제의 보도 통제는 극심했다. 조선일보는 3월 4일 자 기사 서두에 '이 사건의 내용에 관해서는 게재 금지가 되었기 때문에 법정 안에서 재판관과 피고 사이에 논의된 사항은 기록하지 못하오니 애독 제위는 양해 바랍니다'라고 안내했을 정도다.

그러나 이석은 '(박열의) 반항적 기개에 재판장도 당황'이라는 생생한 법정 스케치를 보냈다. '검사의 기소 이유를 들은 박열이 한 번 냉소한 뒤, 돌연히 일어서서 자필로 쓴 '나의 선언'이라는 20여 장에 이르는 장문의 원고를 소매 속에서 꺼내 들고 웅장한 목소리를 더 높여서 유창한 일본말로 1시간 동안 낭독했다.' 3월 7일 자에는 '맹렬한 (박열의) 기세에 압도되어 사형을 구형할 때는 눈을 내리감고 입안으로 우물쭈물해서 남이 알아들을까 말까 한 목소리로 선언한 검사'의 모습을 전했다.

이석은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가였다. 그는 1925년 2월 전(全)조선민중운동자대회 준비위원을 지내고 같은 해 화요회 회원으로 가입했다. 박열 공판 취재 직후인 1926년 8월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에 연루돼 경성에서 체포됐으나 무죄 판결을 받았다. 조선일보는 1928년 2월 15일 자에서 그를 비롯해서 조선공산당 사건 관련자 14명이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할 때 400여 명의 군중이 환영했다고 전했다. 출옥 후 신간회 운동에 뛰어든 그는 해방 이후인 1947년 경주 군수를 지냈다.

☞박열

경성고보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한 뒤 일본으로 건너갔다. 1923년 히로히토 왕세자 암살을 모의한 혐의로 체포되어 3년 뒤 사형을 선고받았다.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22년 2개월간 복역. 1946년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초대 단장을 지낸 뒤 귀국했으나 6·25 때 납북됐다.

[김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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