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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일사일언] 학교 가는 길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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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이재우 '엄마의 뇌에 말을 걸다' 저자


한때 최불암 선생님이 해설자로 나오는 KBS '한국인의 밥상'의 작가로 일했었다. 장수 프로그램일수록 쉬울 것 같지만, 아이템 기획이 쉽지 않다. 머리를 쥐어짜면서 기획한 아이템 중 하나가 '학교 가는 길 길동무 밥상'이었다. 다양한 학교 가는 길의 풍경이 있고, 그 지역 산천에서 나는 식재료로 만든 추억의 음식을 밥상에 차리는 게 목표였다.

한 달여 추적 끝에 강원, 충북, 경상도 삼도의 접경 지역에 있는 의풍과 영춘 초등학교 동창생들을 만났다. 노루목 고개를 넘고, 남천천을 건너며 학교 가는 길은 십리길이었단다. 이제 60대가 된 동창생들이 학교 가는 길 추억담을 풀어놓는데 사전 취재를 온 나의 직분을 잊을 정도로 가난했지만 풍요로웠던 그분들의 정서에 빠져들었다.

'굴렁쇠 굴리며 가니 어느새 학교 앞/ 빈 깡통에 돌 넣어 차면서 달리던 즐거운 학교 길/ 도랑치고 꾸구리 잡으며 건넜던 천변 풍경'. 마치 내가 겪었던 일인 듯 눈앞에 풍경이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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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 학교 길에는 창의적인 놀잇감이 널려 있었다. 학교를 오가는 길 콩서리, 닭서리로 배고픔을 달래기도 했다. 강가에서 잡은 메기로 즉석 매운탕을 끓이고, 학교 수업을 땡땡이치고 친구네 집에서 먹었던 토끼고기 만두, 운동회 날 만들어 먹은 시래기와 좁쌀을 넣은 순대까지…. 벌써 인정이 넘치는 넉넉한 밥상이 한상 차려졌다.

오늘날 학교 가는 길에는 재미난 놀이는커녕 학원 가는 버스 안에서 단어장을 들고 외우는 아이들의 풍경이 더 익숙하다. 생기부(생활기록부)에 스크래치가 날까봐 학교 빼먹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으니, 학교 가는 길의 풍류도 길 동무와 물고기 잡아 구워 먹던 추억도 아스라이 사라져 버렸다. 밥상 위 아날로그 감성을 후세대에 어떻게 물려줘야 할까.




[이재우 '엄마의 뇌에 말을 걸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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