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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9 (일)

[Tech & BIZ] 동아리방 수준에만 만족하던 박사들, 美 다녀오더니 "해볼만하다"며 도전… 기꺼이 투자금 200억 모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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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비즈

류중희 퓨처플레이 대표




창업가는 태어나는 것일까 아니면 키워지는 것일까. 스타트업 업계에서 이 주제는 자주 다뤄지고, 또 그만큼 정답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니, 각자가 자기 정답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게 더 맞는 말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다. 창업가는 창업가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난다. 그리고 그 씨앗을 알아보는 수많은 사람의 열정에 의해, 때로는 스스로에 의해 키워진다.

자율 주행 핵심 센서 라이다(LiDAR)를 개발하는 에스오에스랩(SOS Lab)의 사연은 그 좋은 예이다. 2016년 처음 에스오에스랩을 알게 된 것은 이전에 투자했던 광주과학기술원(GIST) 출신 뇌과학 AI 스타트업 뉴로핏(Neurophet) 빈준길 대표의 소개 덕이었다. "우리 학교에 훌륭한 박사님들이 모여 스타트업을 하나 만드셨어요. 류 대표님이 한번 꼭 내려오셔서 만나 보셨으면 하네요."

보통은 "훌륭한 스타트업이 있으니 얼른 투자해라" 정도의 추천을 많이 받는데, "일단 만나보라"고 말꼬리를 흐리니 더 궁금했다. 광주에 있는 에스오에스랩 사무실을 처음 방문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사무실이라기보다는 차라리 동아리방 같았다. 라이다 기술을 전공한 박사들이 모여 창업했다기엔 너무 단출했다. 기술보다 직접 만들었다는 'GIST Do It'이라고 쓰인 종이 가방이나 사무실에서 키우는 강아지를 자랑할 때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돈은 어떻게 벌고 있나. 투자도 받지 않았는데"라고 묻자, 정지성 SOS 랩 대표는"사무실은 학교에서 지원받았고, 주말에 주변 초등학생들에게 코딩 교육을 하면서 가욋돈을 벌고 있다"고 답했다. "아니 라이다 전공하셨는데 라이다는 왜 안 만드시고요?"고 재차 묻자, "검색해 봤더니 미국 라이다 회사들 모두 수천억원씩 투자받았더라. 우리가 어떻게 그렇게 투자받나. 그냥 이렇게 안분지족하는 것도 좋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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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테크 행사에서 자사의 자율주행 기술을 설명하는 정지성 SOS 랩 대표(가운데). /퓨처플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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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웠다. 틀림없이 회사를 만든 데에는 계기와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 이후로 퓨처플레이 파트너들은 틈만 나면 정 대표와 다른 공동 창업자들을 만났다. 창업은 새로운 '업(業)'을 만드는 일이고 그 '업'이 세상에 기여하면 시장은 투자와 매출로 화답한다고. 결과적으로 대표와 임직원들이 업을 통해 모두 부자가 되면, 다시 더 좋은 회사들을 만들고 키울 수 있다고.

자신의 생각이 있는 사람, 그것도 배움으로 가득 찬 성인을 설득하는 일은 쉽지 않다. 얼마나 이런 '뽐뿌질'을 해야 해나 고민이 깊어지던 즈음, 정 대표에게 불쑥 연락이 왔다.

"대표님, 페이스북 친구 리스트를 보니 미국 라이다 회사에 근무하시는 분이 있던데 소개해 주세요. 일단 해볼 만한지 아닌지를 미국에 있는 회사들 다 만나보고 마지막으로 결정하려고요."

놀랍고 감사한 일이었다. 정 대표는 미국으로 날아가 내로라하는 라이다 회사들에 기술과 사업에 대해 물었다. 그 회사들을 만날 때까지, 인맥을 찾을 때까지 얼마나 맨땅에 헤딩을 했을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정 대표는 "우리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은 미국보다 인건비가 싸니까 1000억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200억 있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 5분의 1"이라고 말했다. 내 대답은 "예, 저희가 200억원은 투자받을 수 있게 도와드리겠다. 같이 뛰자"였다.

아직 에스오에스랩이 갈 길은 멀다. 그러나 투자자인 나는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스스로 알을 깨고 진짜 창업자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에스오에스랩의 경우를 보며 항상 생각한다. 초기 투자자의 업은, 두꺼운 껍질 속에 숨겨진 창업자의 참모습을 알아봐 그 씨앗이 땅을 뚫고 싹을 틔울 수 있게 돕는 일이 아닐까.




류중희 퓨처플레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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