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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한은형의 느낌의 세계] 살가죽과 뼈, 구멍 몇 개의 우연한 조합… 그 얼굴서 읽어야 할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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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와 링컨, 이규보… 얼굴과 관상에 각별한 뜻 부여

눈·코·입·피부 등 유전적 요소에 표정과 감정, 인생도 함께 담겨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 무엇인가

조선일보

한은형 소설가


얄팍한 사람들만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내 의견이 아니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오스카 와일드였다. '얄팍한 사람들만이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고 말했더라면 이 말은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말은 윤리적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따분하니까. 오스카 와일드가 준수한 외모를 지닌 댄디였고, 외모 지상주의자였다는 게 좀 걸리기는 하지만 이 말은 생각해볼 만한 질문들을 던져준다. '외모란 무엇인가' '얼굴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얼굴을 이루고 있나' '얼굴에서 보이는 것들은 무엇인가' '보이지 않는 것들은 또 무엇인가' 등등을 말이다.

오스카 와일드의 '외모 절대론'은 마흔이 넘으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에이브러햄 링컨의 말과도 통한다. 링컨은 어떤 맥락에서 이 말을 한 걸까? 이런 상황이었다고 한다. '얼굴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채용을 거절한 링컨에게 누군가가 항의했던 것. "불쌍한 그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이 없지 않습니까?" 링컨은 말한다. "아니, 마흔이 넘은 모든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네." 링컨은 그 사람의 '얼굴'에서 무엇을 읽었던 것일까?

일단, '이목구비'라 불리는 귀와 눈과 입과 코부터. 그로부터 우리는 '느낌이 좋다' '거만해 보인다' '성실할 것 같다'는 인상을 받지만, 이것들은 그저 살가죽과 뼈와 몇 개의 구멍이 결합되어 만든 우연에 불과하기도 하다. 그런 동시에 조상들의 어딘가가 내게 상속된 것이기도 하다. 부모, 외조부모, 친조부모의 어딘가가 내게로 이동해왔다. 그리고… 얼굴은 눈, 코, 입, 귀와 눈썹과 피부와 머리카락으로만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니다. 표정이 있다. 우리는 피부 아래 근육들을 움직여 표정을 짓고, 표정에는 감정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인생의 내력과 상처와 좌절이 담긴다. 어디 그뿐인가. 인간의 몸을 물질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보자. 인간의 몸을 이루는 구성 성분은 수분이 70%. 그 말은 우리 얼굴에도 수분이 70%라는 말. 얼굴의 70%는 계속해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얼굴이 흐르고, 표정이 흐른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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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나오는 인상학도 참고할 만하다. 멜빌에 따르면, 코가 얼굴을 결정짓는다. 코는 얼굴의 중심이기도 하며 이목구비가 만들어내는 표정을 거의 주재하기 때문이다. 정원을 만들 때 첨탑이 필수적인 것처럼 코도 그러하다는 것. 이마에 대한 표현이 아주 신선한데, 신비로운 이마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법령에 내리찍는 커다란 황금 옥새나 마찬가지라고 말한다. 또 이마에 난 주름에서 눈에 찍힌 사슴의 발자국을 따라가는 하일랜드 사냥꾼들의 경로를 상상하기도 한다. 사람의 얼굴을 광활한 대지에 비유해, 그 대지에 생태계를 들이고, 기상 현상까지 설정하는 것이다. 사람의 얼굴에서 입체적인 내러티브를 창조하는 멜빌의 방식을 읽다 내 얼굴에 나타난 이야기는 어떤 것일지 궁금해졌다. 멜빌 같은 사람이 내 얼굴을 읽어준다면 내 얼굴은 어느 시대의 누구와 어떻게 만나게 될 것인지 말이다.

이규보가 쓴 얼굴에 대한 글도 멜빌만큼이나 참신했다. 고려 중기의 문인 이규보는 얼굴을 보는 법, 그러니까 관상법에 대해 적어 두었다(김하라 편역, '욕심을 잊으면 새들의 친구가 되네', 돌베개). 이상하게 말하는 관상쟁이로부터 배운 거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부귀하고 신분이 높아 보이는 사람에게는 당신만큼 천한 족속도 없다 하고, 장님에게는 눈이 밝은 사람이라고 하고, 잔인해 보이는 사람에게는 만인의 마음을 즐겁게 하리라고 말하는 관상쟁이다.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한다. '부귀하면 남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자라고, 죄가 차면 하늘이 그를 거꾸러트린다.' '보이지 않아 눈에 보이는 대로 따르다 치욕을 당하지 않으니 눈이 밝다는 것이다.' '잔인한 사람이 죽으면 기뻐서 찢어져라 손뼉을 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이상한 관상쟁이가 실존했던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13세기 사람인 이규보가 만들어냈을 인물이 나오는 이 글을 읽다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쯤 되면 얼굴에 대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는 것 같다. 한다고 해봤자 내려가려고 하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주는 일 정도? 얼굴은 나에게 속해 있지만 나를 벗어나고, 나를 벗어나지만 다시 내게 되돌아온다. 나의 것이되 나의 것이 아니다. 이런 얼굴들이 도처에 있다고 생각하면 아찔해진다. 풍부하고, 심오하고, 어지럽고, 난해하고, 미묘하고, 복잡한 그 얼굴들이 말이다.

[한은형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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