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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8 (토)

[기자의 시각] 곤 탈출과 검찰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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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최원석 국제경제 전문기자


일본인의 긍지 중 하나는 '일본은 법치주의 국가'라는 것이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후 호소노(細野) 당시 원전 사고 담당장관을 만나 사후 대응을 질문한 적이 있다. 그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은 "관련법 정비를 서두르고 있다"였다. 대응을 물었는데 '법'이 먼저 나온 게 인상에 남았다. 일본 매스컴을 보면 재난·사고로 사람이 죽었을 때 '사망' 대신 '심폐정지'라는 단어를 쓴다. 숨은 멎었지만 아직 법적으로 사망 선고가 내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란 것이다.

그런데 법치국가 일본의 모양새가 요즘 말이 아니다. 카를로스 곤 전 닛산 회장이 지난 연말 레바논으로 도주한 뒤, 지난 8일 기자회견까지 열어 일본 사법제도를 맹비난했기 때문이다. 곤 전 회장은 14개월 전 금융상품거래·회사법 위반 혐의로 도쿄에서 체포돼 보석 상태로 재판을 기다리던 중이었다.

해외 언론이 주목한 것은 곤의 무죄 주장이나 일본 사법제도의 불공정함보다 '인권' 문제였다. 일단 용의자를 잡아들인 뒤 별건 수사로 구속 기간을 연장하고 변호사 없이 종일 심문하는 식으로 자백을 강요하는 방식이다. 곤 사건 이전부터 일본 사회에서도 논란이 많았다.

특히 곤 사건에 대해 해외 언론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잘못을 지적하는 게 하나 있다. '판결이 날 때까지 아내와 접촉을 금지한다'는 보석 조건이다. 판결까지 5~6년은 걸릴 텐데 말이다. 60대 중반인 곤이 일본 땅에서 아내와 만남도 금지당한 채 재판만 기다리라고 하는 게 온당하냐는 것이다. 특히 구미(歐美)의 법 감정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일본 TV에 출연한 일본인 변호사들조차 '비인간적이고 지나친 처사' '일본 사법제도의 오점'이라며 자아비판 중이다.

곤도 레바논 기자회견에서 "일본 사법제도는 기본적인 인권 원칙마저 저버리고 있다" "아내를 보고 싶었다. 만남을 금지당한 채 재판만 기다릴 순 없었다. 일본에서 죽든지, 아니면 탈출이었다"고 공격했다. 곤과 검찰의 혐의 공방이 일반인에겐 이해하기 어렵고 다툼 소지가 있는 것과 달리, 국제사회에 파급력이 있는 호소였다.

곤의 혐의 내용과 별개로, 일본 검찰이 보인 별건 수사와 피의자 인권침해 모습은 우리에게도 익숙하다. 적폐 청산이라는 명목으로 전(前) 정권 인사에 대해 가해진 가혹한 수사로 여러 사람이 목숨을 끊었다. 정도만 다를 뿐이지 이런 형태는 과거 정권에도 있었다. 그러나 청와대의 독재적 개입으로 검찰 개혁은 권력으로부터의 독립과 중립성 확보라는 또 다른 가치 원점으로 되돌아갔다. 인권침해 문제 때문에 검찰 개혁에 시동이 걸렸지만, 청와대의 위선적 행위와 이중 잣대로 길을 잃고 엉뚱한 수렁에 빠지고 말았다. 옆 나라서 벌어진 곤 사건을 일본이 골탕 먹은 재밌는 소극(笑劇)으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최원석 국제경제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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