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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덕후 월드] 낚시꾼의 '뻥'은 진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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꾼들은 추억의 大魚를 첫사랑처럼 간직한다

낚시꾼의 '뻥' 제지 마시라… 자연산 우럭회 얻어먹을지도

조선일보

하응백 문학평론가


'뻥'이란 속어가 있다. 뻥튀기에서 유래한 말인 듯한데 '무엇을 과장하여 이르는 말'을 뜻한다. '뻥'은 거짓말과는 어감이 좀 다르다. '뻥친다' '뻥이다' '뻥깐다' 등으로 활용된다. 이런 '뻥'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사람들이 바로 낚시꾼이다.

수년 전 광어 낚시를 하러 충남 태안 신진도항으로 갔을 때다. 배에 올라 본격적인 낚시 포인트까지 가는 데는 짧게는 30분, 길게는 두어 시간이 걸린다. 지루한 항해 중에 낚시꾼들은 배 후미에 모여 잡담하는 경우가 많다. 생면부지 사람들이 모여 오로지 낚시라는 화제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것이다. 이때의 이야기는 '어마 무시한' 대어를 잡았거나 아이스박스 하나를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는 등의 무용담이 주를 이룬다.

"지난주에는 막판에 광어를 한 마리 올렸는데 빨래판 두 개를 붙여놓은 거만 했지 뭡니까." 이때 '뻥치지 마세요'라고 하면 절대로 안 된다. 자신도 '뻥'에 합류할 기회를 놓치기 때문이다. 다음 말이 이어진다. "집에 가지고 가서 회를 떴더니 동네 사람들 13명이 먹다 남았습니다." "크긴 컸나 봅니다" 하고 맞장구를 치면 "위 판만 회를 뜬 겁니다"라는 답이 이어진다. 광어로 회를 뜨면 아래 판과 위 판이 각각 나오기에 하는 말이다. 이런 '뻥'이 나오면 후속타로 다른 꾼의 경험담이 계속된다. "작년에 제주로 갈치 낚시 갔을 때 새벽에 한 마리 제대로 올렸죠. 10지 정도는 되었을걸요." 하면서 두 손바닥을 펴 보인다. 갈치의 크기는 사람의 손가락 너비로 표현한다. 가령 3지라면 손가락 세 개 정도 너비의 크기다. 보통 시장에서 보는 갈치의 크기가 3지 정도이고 4지나 5지는 대물이다. 그런데 10지라니. 이건 갈치라기보다는 괴물에 속한다.

조선일보

일러스트=이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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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도 심하다 싶은 생각이 들 때쯤이면 누군가가 제지한다. "에이 그런 갈치가 어디 있어요? 내가 6지, 7지까지는 잡아봤지만 10지는 듣도 보도 못했네." 그러면 10지의 발화자는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휴대폰 사진을 뒤진다. 대개 그 사진은 실수로 지워졌지만 그 사진이 실제 존재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이미 다른 꾼이 또 다른 '뻥'의 세계로 일행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돌돔 대물과 힘겨루기를 하다가 용왕님을 알현하러 간 추자도의 전설적인 낚시꾼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다가 포인트에 도착하면 '뻥'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꾼들은 실전에 돌입한다.

잡은 물고기에 비해 놓친 물고기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자란다. 지난가을 뱃전까지 끌어올려 뜰채에 담으려는 순간 바늘털이를 하며 유유히 바닷속으로 사라진 농어는 1m는 족히 넘었을 것이고, 몇 해 전 남해에서 요동을 치면서 목줄을 끊고 코앞에서 달아난 우럭은 7자는 되었을 것이다. 꾼들은 이런 추억의 대어를 첫사랑의 아련함처럼 몇 마리씩은 마음 한쪽에 간직하고 있다.

남자들에게 군대와 군대 축구와 낚시 세계에서의 '뻥'은 무궁무진하다. 이 중에서도 낚시꾼의 '뻥'은 유쾌하기까지 하다.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다. 그게 거짓말과 다른 점이다. 주위에서 낚시꾼이 '뻥'을 친다면 사기꾼이라고 생각하지 마시라. 그의 황당하고도 황홀한 '뻥'도 제지하지 마시라. 침을 꼴깍 삼키면서 새해에는 꼭 한번 먹고 싶다고 간절히 말해 보시라. 그러면 2020년 경자년이 가기 전에 푸른 바다에서 갓 잡아 올린 싱싱한 자연산 우럭회와 광어회가 당신 앞에 차려질 것이다. 새해, 운이 좋으면 붉바리나 자바리와 같은 고급 어종을 맛볼 수도 있다. 그 푸른 잔치에 당신도 동참할 기회는 열려 있다.

[하응백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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