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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29 (수)

[동서남북] '잊혀질 권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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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 "임기 후 잊혀지고 싶다"

남의 과거는 적폐로 파헤치고 자신은 잊어달라는 '내로남불'

정치인은 잊혀질 권리 없어

조선일보

황대진 정치부 차장


"임기 후 잊혀진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 신년 회견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말이다. 왜 잊혀지고 싶을까. 문 대통령은 정부가 172억원을 들여 자신을 위한 기록관을 짓겠다고 하자 '불같이' 화를 낸 적도 있다.

대통령 주변엔 "잊어 달라"는 사람이 많다. 핵심 측근으로 꼽히는 양정철 민주연구원장도 그랬다. 양 원장은 2017년 대선이 끝나자 "잊혀질(어법으론 '잊힐'이 맞는다) 권리를 허락해달라"며 해외로 나갔다. 양 원장이 이끌던 문재인 대선 캠프에는 '디지털소멸주권강화위원회'란 조직도 있었다. 여기 위원장을 하던 '잊혀질 권리' 전문가는 자신이 운영하던 회사 직원에 대한 '갑질' 의혹으로 수사를 받다 극단적 선택을 했다.

'잊혀질 권리'는 주로 인터넷상에서 자신과 관련된 정보의 수정이나 삭제를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EU 사법재판소가 이를 인정했다. 명예훼손이나 사생활 침해가 아닌 합법 정보도 지워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미국 쪽에선 잘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다. 표현의 자유와 충돌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잊혀질 권리를 주장하는 자는 대중들 사이의 합법적 소통을 차단하고 검열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이미지를 구축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정치권에서도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무소속 이언주 의원이 '개성공단은 국내 일자리를 없애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민주당 신동근 의원은 이 의원이 과거 민주당 소속일 때 '개성공단 지킴이' 모임에 들었던 사실을 공개했다. 그러면서 "정치인에게 잊혀질 권리는 없다"고 했다.

문 대통령도 정치인이다. 그는 신년 회견에서 청와대를 수사하는 검찰 팀을 잘라낸 인사에 대해 "인사권은 대통령에게 있고 이는 존중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2012년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 시절에는 "청와대가 검찰 수사와 인사에 관여했던 악습을 완전히 뜯어고치겠다"고 했다. 정치인의 말과 행동을 쉽게 잊을 수 없는 이유를 보여주는 사례다.

법적으로도 잊을 수 없게 돼 있다. 문 대통령은 올해 512조원, 작년 470조원, 재작년 428조원 예산 집행의 총책임자다. 임기 동안 국민 돈 2500조원가량을 쓰고 나갈 것이다. 그런 그를 잊지 않기 위해 또 예산이 들어간다. 대통령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은 '대통령의 직무수행과 관련한 모든 과정 및 결과가 기록물로 생산·관리되도록 하여야 한다'(제7조)고 규정한다.

사실 이 정권은 '잊지 않기'의 선수들이다. 문 대통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유서를 품고 다니며 '아름다운 복수'를 다짐했던 사람이다. 대통령 당선 후에는 100대 국정 과제 제1호로 적폐 청산을 내걸었다. 부처마다 청산위원회를 만들고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조그만 잘못까지 파헤쳐 두 대통령을 감옥에 넣었다. 두 정권에서 일한 공직자 100여명이 기소되고 50여명이 구속됐다. 심지어 무생물, 4대강에 설치한 보(洑)마저 잊지 않고 해체했다. '잊혀질 권리'도 '내로남불'이다.

문 대통령이 퇴임 후 진지하게 '잊혀질 권리'를 주장할 것 같지는 않다. 그래도 워낙 인권과 사생활을 중시하는 분이어서 혹시 어쩔지 모른다. 그럴 경우에 대비해 신 의원이 괴테의 '파우스트' 속 대사를 인용해 이 의원에게 했던 말을 들려주고 싶다. "내가 세상에 남겨놓은 흔적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적당히 해라! 적당히! 무모한 짓은 하지 말아라." 문 대통령은 "임기 후 좋지 않은 모습은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황대진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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