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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총선의 해, 2천년 전 여성에게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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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강명관의 고금유사

중국 전국시대 노(魯)나라 목공(穆公) 때의 일이다. 목공은 33년을 재위했으니 꽤 오래 왕 노릇을 한 셈이다. 왕 개인으로서는 좋았겠지만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왕위를 이어받을 태자가 어렸던 것이다.

칠실읍(漆室邑)이란 고을에 사는 아가씨 한 사람이 어느 날 자기 집 기둥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다. 이웃 사는 아주머니가 놀러 왔다가 그에게 물었다. “왜 그리 슬피 우는가? 시집을 못 가서 그러는가? 내가 배필을 구해 볼게.” 아가씨는 그 말에 핀잔을 주었다. “뭔가 아시는 분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주머니는 아무것도 모르십니다.” 자신이 우는 이유는 지금 노나라 왕이 늙고 태자가 어린 것을 걱정해서라고 말했다.

그게 무슨 울 만한 이유가 되는가? 그런 것이야 나라의 높은 벼슬아치들이나 걱정하는 것이지, 우리네 여자들과 무슨 상관인가? 아주머니가 따져 물었더니, 답인즉 이러했다. “예전에 진(晉)나라에서 온 손님이 말을 우리 집 채마 밭에 매어두었는데, 말이 달아나면서 채마 밭을 마구 밟았고 그 결과 나는 그해가 다 가도록 아욱을 먹지 못했지요. 한번은 우리 집 이웃 여자가 외간남자와 바람이 나서 달아났을 때 그 집안의 부탁을 받은 우리 오빠가 그 여자를 잡으러 갔다가 마침 장맛비로 불어난 강물에 빠져 죽었지요. 이게 내게 오빠가 없는 이유랍니다.”

그가 아욱을 먹지 못한 것은 진나라 손님이 찾아왔기 때문이고, 오빠가 없는 것은 이웃 여자가 바람이 났기 때문이다. 아무 상관성이 없는 것 같은 현상도 따지고 보면 필연적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지금 노나라 왕은 늙어 사리분별이 없다. 왕위를 이어받은 태자는 어리고 또 어리석다. 이런 이유로 이 나라에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다. 만약 노나라에 어떤 사고라도 터진다면 나라를 다스리는 왕과 신하, 또 그들의 아비와 아들이 모두 치욕을 당할 것이다. 그리고 화(禍)가 급기야 뭇 백성들에게 미칠 것이다. 우리네 여자라 해서 피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그의 말은 거침이 없었다.

아주머니는 사과했다. “당신의 깊은 생각은 내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네요.”

3년 후 노나라 내정(內政)이 어지러워진 틈을 타서 제(齊)나라, 초(楚)나라가 잇달아 쳐들어왔고 이로 인해 노나라는 전쟁에 시달리게 되었다. 남자들은 징집되어 전쟁터로 내몰렸고 여자들은 군수품을 싣고 날라야만 하였다. 나라는 쑥대밭이 되었다. 아가씨가 우려했던 바가 사실이 되었던 것이다.

국가의 상층부에서 이루어지는 정치가 나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 아니 도리어 그것이 나의 삶을 결정적으로 지배한다는 것을 그는 간파했다. 국가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는 왕과 태자의 늙고 어리석음이 자신과 같은 민초들을 한없는 고통으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눈물을 쏟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는 정치인 사이에 벌어지는 그들만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직접 지배하는 것이다. 촛불혁명 한국의 시민은 2천 년 전 칠실읍의 여성보다 정치적으로 깊이 의식화된 사람들이다. 올해는 총선이 있는 해다. 투표를 통해 정치인이 아니라, 우리 시민이 정치의 주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부산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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