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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8 (수)

고래와 파도 사이, 상상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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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생각] 정혜윤의 새벽세시 책읽기

한겨레

방랑자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민음사(2019)

가슴을 두드리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글이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바닷가에서 길 잃은 고래가 또다시 해변으로 헤엄쳐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람들이 우르르 모래사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교대로 고래 옆을 지키고 서서 그 섬세한 피부에다 물을 뿌리며 바다로 돌아가라고 설득했다. (…) 온종일 조그만한 체구의 인간들이 만조를 기다리며 해변을 맴돌았다. 고래를 다시 심해로 데려가 달라고 물에게 간구하면서. 그물을 보트에 묶고 강제로 고래를 끌어당기기 위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그 뒤로 어떻게 되었을까? 더 많은 사람이 고래를 찾아왔다. 시골 학교의 교사가 반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그녀의 학생들은 ‘고래와의 작별’이라는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방송국 사람들도 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지구온난화와 환경문제를 소재로 한 영화들이 상영되었다. 정치인들은 환경보호에 관한 선거공약을 준비했다. 무엇 때문에 고래들이 이런 선택을 하는 걸까, 어류학자와 생태학자들이 토론했다. 그사이 고래는 죽었다. “만약 이 세상에 고래를 위한 공동묘지가 존재한다면 틀림없이 그곳으로 옮겨갔으리라.”

노벨상 수상작가 올가 토카르추크 소설 <방랑자들>의 한 부분인 이 글은 무척 아름답다. 죽음에 대한 경의, 생명에 대한 애틋함이 있기 때문이다. 이 글 속에서 인간의 자리는 고래와 파도 사이 어딘가에 불과하다. 좋은 자리다. 사실 우리는 매일 해와 달 사이에 있다. 인간의 질문과 인간의 그 좋은 능력인 ‘상상력’은 고래의 죽음을 향해 있다. 고래는 죽음으로써 우리에게 “방향위치 감지시스템의 붕괴, 해수오염, 그리고 어느 나라도 자백하지 않는 바다 밑에서의 핵폭탄 폭발”에 대해, 어쩌면 동료를 잃은 고독에 대해 들려주는 것일 수 있다.

이 글이 여행을 모티브로 한 백여편의 글 중 한편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 글은 식도락에 대한 이야기, 그러니까 고래고기의 맛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도 많은 사람이 한 번뿐인 삶이 소중해서 현재를 즐기려고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은 ‘현재를 즐기기’의 정반대다. 삶을 소중히 여긴다는 것. 그것은 유한한 생명끼리 사랑하고 덜 힘들게 지내도록 애틋할 정도로 소중하게 보살핀다는 것을 빼놓고는 말할 수 없다. “계속 살아라!”라는 말은 “계속 사랑하라”는 말과 같을 때 빛이 난다. 빛이 어둠 속에서 솟아오른다는 오래된 희망의 말에 근거해 이런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고래의 자살이란 어둠에서도 빛이 피어날까? 오스트레일리아 산불로 죽은 코알라의 어둠, 캥거루의 어둠에서는? 낙관하기는 힘들다. 유한한 생명인 우리는 살아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다른 생명이 살아 있는 것도 좋아하는지는 의문이다. 이 글은 이렇게 끝난다.

“범고래 빌리는 그렇게 대기 속에서 익사했다. 사람들은 비탄에 잠겼다. 하지만 이따금 그들 중 일부의 생명을 구해내는 데 성공하는 경우도 있었다. 자원봉사자 십수 명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고래들이 깊은 호흡을 들이마시면서 대양으로 돌아갔다. 그들이 하늘을 향해 저 유명한 분수를 활기차게 내뿜고는 바다 깊숙이 잠수하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바닷가에 모인 군중은 박수갈채를 보내곤 했다. 하지만 몇 주 후 고래들은 일본의 한 해안에서 붙잡힐 것이고, 그들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몸통은 개밥이 되고 말 것이다.”

(시비에스) 피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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