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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3 (월)

[손호철의 피카소를 찾아서]바르셀로나 골목이 낳은 ‘아비뇽의 여인들’…미술을 바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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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말라가와 바르셀로나 ‘현대미술혁명’을 향하여

내가 아이일 때, 어머니는 나에게 “만일 네가 군인이 되면 장군이 될 것이고, 성직자가 되면 교황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대신 나는 화가가 됐고 그래서 피카소가 됐다.(피카소)

내가 라파엘처럼 그리는 데 4년이 걸렸다. 그러나 어린애처럼 그리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피카소)

모든 창조행위는 먼저 파괴가 선행되어야 한다.(피카소)

경향신문

피카소가 25세 때이던 1907년 그린 ‘아비뇽의 여인들’. 사실적인 회화의 전통을 깬 큐비즘을 연 이 작품은 현대미술의 혁명적 전환점으로 평가받는다. 최근 전문가들이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선정한 바 있다. ‘아비뇽’은 바르셀로나의 피카소 화실이 있던 거리 ‘아비요’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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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흡연은 살인이다.” 최근 들어 흡연의 폐해가 주목받고 있다. 그러나 흡연이 인류사적으로 크게 기여한 것이 있다. 흡연이 아니었으면, 우리는 피카소라는 20세기 최고 미술가의 작품을 누릴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881년 10월25일 밤, 스페인 말라가의 한 중산층 집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아이는 울지도, 숨을 쉬지도 않았다. “안타깝지만, 사산입니다.” 산파는 안타까워하는 얼굴로 아이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놀란 산모와 식구들은 울기 시작했다. 아이의 삼촌은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시가를 꺼내 불을 붙이고 깊게 한 모금 빤 뒤 내뿜었다. 강한 연기가 방 안에 퍼지자 아이는 갑자기 자지러지듯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시가 연기 때문에 살아난 아이, 그가 바로 피카소다.

지중해. 유럽의 ‘남쪽 바다’인 지중해는 감청색 바다와 작열하는 태양, 열정 등 묘한 매력으로 사람들을 잡아당긴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희랍인 조르바>나 알랭 들롱이 주연한 1960년대 명작 <태양은 가득히>를 지중해가 아니라 대서양이나 북해를 배경으로 만들면 어찌 될까? 그 맛이 안 날 것이다. 평생 16만점 이상의 작품을 생산한 ‘정열의 화신’ 피카소는 많은 시간을 파리에서 보냈다. 하지만 자신이 스페인의 지중해 항구도시 말라가 출신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지중해인’임을 자임했다. 그는 평생 지중해를 그리워했고, 말년을 프랑스의 지중해지역에서 지내다 이 세상을 떠났다.

말라가는 마드리드로부터 남쪽으로 528㎞ 떨어져 있어 5시간 이상 달려가야 한다. 말라가를 지나는 고속도로는 고지대를 통과하고 있어서 차를 타고 달리다보면 저 아래로 말라가 시내와 지중해 바다가 보인다. 피카소가 자라던 동네는 이제 그를 기리는 미술관으로 변모했다. 동네 전체가 피카소마을로, 미술관을 찾아온 관광객이 넘쳐나고 관련 기념품을 파는 가게들이 가득하다. 말라가 피카소미술관에 들어갔다. 피카소의 여러 작품들이 다 볼만하지만 특히 볼만한 것은 피카소의 어릴 적 그림이다. 8세 때 그린 ‘말라가항’이란 유화, 13세 때 그린 ‘롤라의 초상’이란 유화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지만, 피카소 천재성의 싹을 보여주고 있다.

말라가가 피카소의 ‘육체의 고향’이라면 바르셀로나는 ‘정신의 고향’

‘아비뇽의 여인들’ 속 지명 ‘아비요 거리’는 유명한 사창가이다

당시 화단은 “미친놈의 작품”이라 평했지만 이후 모든 게 달라졌다

사실적으로 그리던 회화의 전통을 깬 현대미술이 시작된 것이다


피카소는 정물과 비둘기를 많이 그렸지만 화가로서는 ‘실패한 화가’라고 할 수 있는 미술선생의 아들로 태어났다. 피카소가 비둘기를 많이 그린 것(평화의 상징으로 사용되는 비둘기 그림도 그가 그린 것이다)은 아버지 영향이 크다. 어머니의 회상에 의하면 그가 처음 한 말이 ‘연필’이었다고 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무 데서나 그림을 그렸고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도 미술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수업시간에 수업은 안 듣고 그림을 그리거나 기회가 있으면 학교를 도망쳤다. 9세 때, 아버지가 월급을 더 많이 주는 북쪽 대서양(라코루냐)으로 이사를 가게 됐는데 전학에 필요한 학업성적이 너무 부족해 아버지가 친구에게 특별히 부탁해 시험 답을 가르쳐주고서야 간신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후 라코루냐에서 다시 바르셀로나로 옮긴 뒤 아버지는 그를 미술학교에 보냈지만 곧 흥미를 잃었다. 그는 오히려 거리에서 스스로 배우기를 원했고 마드리드로 보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만난 친구인 팔라레스와 그의 고향인 시골마을에 갔는데 거기에서 자연과 농부들의 삶을 보고 그렸다. 그는 나중에 대가가 된 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팔라레스의 마을에서 배웠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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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가 아버지 손에 이끌려 등록했던 바르셀로나 예술학교는 현재 건축회관으로 변했다. 건물의 3면에는 피카소 그림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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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카소의 어린 시절은 우리의 교육, 특히 예술교육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그는 정규교육을 거부했지만 자연과 현장에서 그림을 그리고 연구해 독창적인 스타일을 개발하고 세계 최고의 화가가 됐다. 이는 학원교육으로 아이들의 창의성을 죽이는 우리 교육, 특히 미술교육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피카소는 말한다. “모든 어린이는 예술가다. 문제는 어떻게 어른이 돼서도 예술가로 남아있느냐는 것이다.” 우리 교육은 ‘아이들 속에 있는 예술가를 죽이는 교육’이 아닐까? 매일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노란 학원버스에 실려 몇개 학원을 순례해야 하는 우리 아이들에게 피카소 같은 독창성을 기대한다는 것은 무리다.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발명품인 컴퓨터에 열광할 때, 피카소는 비수 같은 말을 남겼다. “컴퓨터는 쓸모없다. 우리에게 답만 줄 뿐이다.” 컴퓨터는 우리가 묻는 질문에 답을 해줄 뿐이며, 진짜 문제는 우리가 어떤 질문을 던질 것이냐는 것이다. 창의성은 우리가 던지는 질문 속에 있다.

‘스페인의 꽃’인 바르셀로나는 사그라다 파밀리아성당을 지은 천재건축가 ‘가우디(안토니오 가우디·1852~1926)의 도시’이다. 그러나 ‘피카소의 도시’이기도 하다. 피카소는 말라가에서 9세 때까지 살았고 이후 10대와 20대 초반 대부분을 바르셀로나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이후 그가 파리에서 활동할 때도 바르셀로나에 부모와 친지들이 살고 있어 자주 찾았다. 말라가가 그가 태어난 ‘육체의 고향’이라면, 바르셀로나는 그의 의식을 키운 ‘정신의 고향’이다. 피카소가 청년기를 보내던 바르셀로나는 공장이 들어서고 도시화, 산업화, 근대화가 시작되던 때이다. 피카소는 당시 새로운 사조로 지식인들 간에 주목받고 있던 모더니즘의 전파소라고 할 수 있는 카페 ‘네 마리의 고양이’에서 여러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그곳에서 그는 모더니즘과 정치적 급진사상인 무정부주의에 매료되기 시작했다. 이 카페 문에는 피카소가 술값 대신 주고 간 이 카페 그림이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아버지가 등록을 시켜줬지만 피카소가 ‘땡땡이’를 친 예술학교는 이제 건축회관이 되어 있다. 그 겉면에는 3면을 돌아가며 피카소 그림을 그려놓았는데, 그렇게 그리게 되는 데 많은 시간이 걸렸다고 피카소가 말한 ‘어린이 같은 그림’이다. 피카소가 계속 정식교육을 거부했지만, 그의 천재성을 인정한 아버지는 자신의 그림도구를 물려주고 피카소가 15세가 되자 전용화실을 마련해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카소는 19세 때부터 아버지 성인 ‘루이스’를 버리고 어머니 쪽 성인 ‘피카소’만 쓰기 시작했다. 나중에 보겠지만, 그가 강한 ‘남성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는 잘 이해되지 않는다.

이 화실을 지나면 골목이 나타난다. ‘아비요’거리다. 피카소에게 있어서, 나아가 세계미술사에 있어서 혁명적 전환점이라는 ‘아비뇽의 여인들’의 ‘아비뇽’이 프랑스의 아비뇽이 아니라 바로 이 거리를 말한다. 이곳은 바르셀로나의 유명한 사창가로 피카소는 그림 제목을 ‘아비뇽의 사창가’로 하려 했지만, 화상·화랑 등이 너무 비호감이라고 ‘아비뇽의 여인들’로 바꾼 것이다. 피카소가 25세 때인 1907년 그린 이 그림은 이전까지 사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던 회화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문법으로 그림을 그린 현대미술의 효시, 특히 여러 큐브를 합치고 배열해 놓은 것 같다고 해서 큐비즘(내지 평면에 입체를 그려놓은 것 같다고 해서 입체파)이라고 부르는 흐름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다. 최근 전문가들이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선정한 그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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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는 피카소에게 ‘정신의 고향’이다. 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에는 피카소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하녀들’을 변조해 그린 45개의 그림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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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18세 때인 1900년 세계예술의 메카인 파리에 갔지만 같이 간 친구에게 일이 생겨 돌아와야 했다. 그 후에도 다시 갔다 인정을 받지 못하고 돈이 떨어져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최근 피카소의 초기 작품들을 정밀검사한 결과 그 밑에 다른 그림이 있는 것이 밝혀졌다. 캔버스를 살 돈이 없어 그림을 그린 캔버스에 다시 그림을 그린 것이다. 그러면서 친구의 죽음으로 우울한 청색이 지배적인 ‘청색시대’, 그리고 뜨거운 연애로 몽환적 분위기인 ‘장미시대’를 거쳤지만 독자적인 세계를 개척하지는 못했다. ‘아비뇽의 여인들’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당시 화단의 평은 “미친놈의 작품”이라는 등 매우 부정적이었지만 선구적인 화상이 이에 반해서 재정적 지원을 약속했다. 피카소는 작품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됐고 점점 명성을 얻게 된다.

다섯 명의 여자를 그린 ‘아비뇽의 여인들’은 오른쪽에 서있는 여자가 검은 마스크 같은 것을 쓰고 있고, 그 아래 앉아 있는 여자는 정면과 옆 얼굴을 같이 그려놓은 것처럼 ‘입체적으로’ 그렸다. 이는 이전 어느 그림에서도 볼 수 없었던 표현방식으로 이 같은 현대미술의 혁명을 가져온 것이 아프리카 마스크라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피카소는 이를 이렇게 회고했다.

“40년 전 내가 흑인미술에 관심을 갖고 그림을 그린 것은 그때 내가 미술관의 ‘미’라고 부르는 것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 트로카데로 박물관에 갔을 때, 습하고 썩은 냄새가 내 목구멍을 엄습했다. 빨리 나가고 싶었지만 남아서 연구를 했다. 이 마스크 등은 신성한 목적, 주술적 목적, 그들과 주위의 미지의 적대적 힘 간의 일종의 매개체로 그것에 형태와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때 나는 회화란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회화란 미적 작업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상한 적대적 세계를 매개하는 주술의 한 형태, 우리의 공포와 욕망에 형태를 부여함으로써 힘을 갖게 하는 방식이다.”

그는 ‘창조적 진공청소기’란 별명답게 아프리카 미술을 흡수했고 미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비판하고 해체했다. “나는 미를 ‘감상’하는 감식가들과 고위층의 눈과 마음의 미적 게임을 싫어한다. 도대체 미가 무엇인가?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그는 미에 대한 통념에 기초한 ‘좋은 취향’이란 “창조성의 최대의 적”이라고 비판했다.

그는 ‘아비뇽의 여인들’의 해체주의적 얼굴 표현을 발전시켜 이후 정면의 얼굴에 옆 얼굴 등을 조합한 큐비즘적 초상을 많이 그렸다. 그는 자신의 혁명적 발상을 명쾌하게 설명하고 있다. 피카소가 뛰어난 점은 단순히 그림만 잘 그린 것이 아니라 자신의 미술철학을 그 누구보다도 탁월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정말 얼굴인가? 얼굴을 찍은 사진? 화장한 얼굴? 이런저런 화가가 그린 초상화? 얼굴의 전면? 내면? 아니면 뒷면? 그러면 나머지 부분은? 모두는 자신만의 특이한 방법으로 바라보는 것 아닌가? 간단히 말해, 데포르마시옹(모딜리아니 그림의 긴 얼굴처럼 형태를 과장하거나 변형시키는 ‘형태파괴’의 미술기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바르셀로나 피카소미술관은 바르셀로나 미술학교 동창으로 평생 피카소의 비서를 지낸 제이미 사바르테스가 기증한 작품 등 볼거리가 풍부하다. 특히 스페인 황금기인 17세기를 대표하는 화가로, 화가들이 좋아하고 이들에게 영향을 준 ‘화가들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을 해체하고 변조한 45개의 그림이 인상적이다. ‘시녀들’은 주 모델인 공주들과 시녀들만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화가, 거울 속 왕과 왕비가 그려져 있어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가”에 대해 근본적으로 생각하게 한다. 이 때문에 프랑스 포스트구조주의 철학자 미셸 푸코가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글을 쓰는 등 미술작품 중 가장 많이 글로 쓰인 명작이다. 게다가 피카소의 생생한 모습을 담은 사진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너무 좋았다. 미술관을 나오려고 하자 피카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화란 시각장애인의 직업이다. 그는 자신이 보는 것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을 그린다.”

손호철 서강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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