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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삶과문화] 동백어’ 필 무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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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받아야 할 비련의 여주인공 / 언어의 고상함으로 존엄성 지켜 / 사랑도 말로 하고 미움도 말로 해 / 욕지거리 하며 존경받는 이 없어

뒤늦게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을 몰아서 봤다. 최근 작품 중 ‘동백꽃…’은 단연 압권이었다. 동백이와 용식의 애틋한 사랑, 탁월한 스토리텔링, 스릴러와 로맨스가 가미된 재미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다. 오늘은 동백이의 언어생활에 주목하고 싶다.

미혼모 동백이는 초등학생 아들을 데리고 홀로 사는 여인이다. 일가친척 없는 고아로 내세울 것 없는 배경에 현직은 술집 주인이다. 웅산이라는 소도시에 정착하기까지 질시와 핍박 속에 살아간다. 동백이의 가장 큰 장점은, 어떤 순간에도 평상심을 잃지 않는다는 거다. 그 마음은 그녀의 언어를 통해 드러난다.

세계일보

명로진 배우 겸 작가


건물주가 손목을 잡으며 성희롱하는 상황에서 동백이는 눈 하나 깜짝 않고 “가격표에 내 손 잡는 값은 없다”고 대응한다. 돈 문제로 절박할 때도 “흙수저니 금수저니 그것도 다 있는 애들 얘기이고, 나같이 아예 숟가락 하나를 못 쥐고 사는 애들은 꽁으로 들어오는 밥 한술이 없다”고 퉁친다. 시장 여인들에게 남자 홀리는 잡부로 오해받을 때도, 깡패가 와서 겁을 줄 때도, 아이의 생부가 찾아와 괴롭힐 때도 동백이는 욕을 하거나 성을 내지 않는다. 1년에 한 번 혹은 두 번, 소리쳐야 할 정확한 때에 소리쳐야 할 정확한 장소에서 소리칠 뿐이다.

일곱 살 때 부모에게 버림받은 동백이는 일찍 깨달았을지 모른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따라 맘껏 떠드는 것조차 있는 사람들 이야기라는 것을. 가진 것 없고 내세울 것 없는 하류 인생은 그저 있어도 없는 듯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것을. 그 그림자 인생 속에서 동백이는 변주 폭이 좁은 언어습관을 생활의 무기로 삼았다.

동정받아야 할 비련의 여주인공이 냉철함과 평정심으로 무장한 채 생의 아픔을 낮고 일정한 톤으로 대응해 나갈 때, 시청자는 호응했다. 동백이는 로맨스 드라마의 새로운 범주였다. ‘동백꽃 필 무렵’은 등장인물들이 가히 신조어라 할 만한 수많은 동백어를 양산하면서 2019년 최고의 드라마로 사랑받았다. 동백이뿐 아니라 남자 주인공 용식, 아역 필구, 용식 어머니, 동백 생모, 파출소 변 소장과 게장 골목 아주머니들까지 찰진 대사를 쏟아냈다. 드라마 전편을 통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문장은 많았으나 상스러운 욕설이나 거친 표현은 거의 없었다는 것이 미덕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언어는 존재의 집이다. 인간성은 말로 드러난다. 사랑도 말로 하고 미움도 말로 한다. 동백이는 인간이 아무리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도 언어의 고상함을 유지하면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한다. 주먹으로 때리고 칼로 찌르는 것만 폭력이 아니다. 가장 일상적이고 흔하지만 가장 간과되는 폭력은 언어폭력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말로 상처받는다. 육신은 멀쩡하지만 정신은 파괴된 채 집으로 돌아온다. ‘성폭력 방지교육’만큼 중요한 것이 ‘언어폭력 방지교육’이다.

미국의 심리학자이자 비폭력 대화센터 설립자인 마셜 로젠버그는 “폭력은 그것이 언어적이든 신체적이든 그 뿌리에 갈등의 원인을 상대방의 탓으로 돌리는 생각이 있다”고 적시했다. 동백어의 특징 중 하나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아이(I) 메시지다. 초등생 아들이 말썽을 피우자 동백이는 “그럼 엄마가 힘들어”라고 말한다. 일상을 방해하는 전남편에게는 “너 때문에 정신이 번쩍 들고 소나기 피하는 법을 알게 됐다”고 대꾸하고 사랑을 끊임없이 퍼 주는 용식을 보며 “이 사람이 나를 고개 들게 하니 내가 뭐라도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이들의 특징이 동백어에 잘 드러난다. 남 탓할 만하고 좌절할 만하고 세상을 향해 온갖 욕을 해도 모자랄 입장의 동백이가 우주의 중심에 자신을 놓고 꿋꿋하게 살아간다. 그래서 동백이는 위대하다.

혀는 손잡이에도 날이 서 있는 칼이다. 상대에게 휘두르는 순간 내게도 상처를 입힌다. 더러운 말을 하면서 존경받는 사람 못 봤다. 욕지거리하면서 아름다운 혼을 소유한 사람 역시 없다. 인생은 살얼음 위를 걷는 행위의 연속인데, 얼음을 깨뜨리는 건 한두 개의 잘못 선택한 단어들이다.

명로진 배우 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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