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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기자가만난세상] 서울에서 전셋집 구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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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서른둘, K는 친구들 사이에서 ‘왕자님’으로 불린다. K가 고귀한 혈통을 가지고 태어나서 왕자님으로 불리는 것은 아니다. K는 서울 왕십리 자이아파트에 자기 집이 있다. 친구들은 부러운 마음에 ‘왕(십리)자(이)’라고 줄여 부른다. 이따금 K가 집에서 여유롭게 클래식 음악을 듣고 있는 모습을 보노라면 진짜 왕자처럼 보일 정도로 부러워진다.

집은 단순한 주거공간이 아닌 계층을 나타낸다. 20대 초반에는 대학교 학생증이 계층의 상징이었다. 심리적으로 높은 남태령이 ‘인서울’과 ‘지방대’를 나누었고, ‘SKY’를 비롯한 서울의 명문대는 귀족이었다. 20대 후반은 명함으로 자신의 계층을 보여줬다. 전문직은 성골이었고, 대기업이나 공기업은 진골이다. 취직조차 하지 못하면 ‘불가촉천민’ 취급을 받는다.

세계일보

김범수 경제부 기자


30대는 집이 신분을 나타낸다. 서울에 자기 명의로 아파트가 있으면 진골이다. 서울에 전세 아파트가 있거나 수도권에 자기 소유의 집이 있으면 6두품, 월세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거나 단칸방을 전전하면 어쩐지 눈총이 따가워지는 걸 느낄 수 있다.

최근에 친형과 함께 서울에서 같이 살 전세 아파트를 알아봤다. 둘 중 한 명이 결혼하기 전까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같이 살아보자는 마음이었고, 무거운 전세 비용도 맞들면 나을지도 모른다는 심리였다. 형제가 의기투합해 전셋집을 알아보러 다닐 땐 전쟁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라도 찍는 것마냥 자못 비장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현실은 잔혹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너무나도 올라버린 부동산값에 형제는 기겁했다.

신혼부부들이 서울 전셋집을 구한다고 가정했을 때 선호하는 크기는 보통 20평대다. 서울의 20평대 전셋집의 가격을 형성하는 세 가지 요소는 교통·주거시설·교육환경으로 묶을 수 있다. 위 세 가지 요소는 각각 2억원이었다. 세 가지를 모두 만족한 20평대 전셋집은 6억원이 넘었다. 셋 중 한두 가지를 포기해야 3억∼4억원에 전세 아파트를 구할 수 있다. 3억원도 마련하지 못하면 교통·시설·학군을 모두 포기하거나 수도권으로 밀려나게 된다.

최근 주택을 사려는 30대가 늘었다고 한다. 올 상반기 중 주택 구매의향이 있냐는 설문조사에서 ‘있다’고 답한 30대가 전체의 31.44%로 40대(36.34%)에 이어 두 번째를 차지했다. 하지만 집을 산 청년 중 월급을 쪼개 모아 집을 구한 이들은 얼마나 될까. 30대 직장인의 연봉을 높게 잡아 5000만원이라고 가정할 때, 단 한 푼도 쓰지 않고 25∼30년 가까이 모아야 서울 중형 평수의 아파트를 살 수 있다. 설령 그렇게 30년을 모아도 그때의 집값이 지금 같지 않을 거라는 건 모두가 안다.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사회를 구성하는 계층 간 이동 기회가 많을수록 사회가 안정된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맞는다면 평생 일을 해도 서울 아파트에 거주하는 ‘진골’이 될 수 없는 한국 사회는 불안정하다. 청년들에게 “부동산값을 잡겠다”는 정부의 말은 공허하게 느껴진다. 아니, 청년들은 이미 오를 대로 올라버린 집값을 보면서 희망을 잃고, 그들만의 부동산 카르텔을 구축한 신흥 진골들에게 하향 평준화를 강요받는 것 같아 좌절한다.

김범수 경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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