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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4 (토)

[정길연의 사람In] 감귤마멀레이드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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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산 노지 감귤 한 상자가 부려졌다. 주문한 적도, 귀띔을 받은 바도 없는 택배였다. 다행히 송장에 보낸 이의 이름이 남아 있었다. 후배 소설가 H였다. 아뿔싸. 1주일 전 일이 떠올랐다. 그날 나는 대단하지도, 그렇다고 가볍지만도 않은 수술을 받았다. 병실로 옮겨져 휴대전화의 전원을 연결하자 액정화면에 H가 보낸 문자메시지가 떴다. 새로 출간한 책을 부치려고 하니 주소를 찍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메시지가 도착한 지 몇 시간이 지나 있었던 터라 주소와 함께 즉각 회신하지 못한 이유를 변명 삼아 덧붙였다.

H가 누군가. 겸손하고 반듯한 성정에다 늘 주위 사람을 챙기는 H는 ‘수술 어쩌고’ 하는 내 답장을 무심히 넘기지 못했다. 퇴원하자마자 보내겠다던 책보다 감귤 한 상자가 먼저 당도한 걸 보니. 상자를 열고 꽉 들어찬 감귤을 가만 내려다보는데, 가슴이 간질간질했다. 내 아무리 마취후유증으로 판단력이 흐리마리했기로 불필요한 근황 중계로 괜한 걱정을 끼쳐 미안하기도 하고, 제 짐도 한 보따리인 후배에게 무슨 어리광을 다 부렸나 싶어 때늦게 후회도 되고 부끄럽기도 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나운 세상에도 여전히 각박해지지 않는 그의 천성이 귀해 고맙고, 그의 찬찬한 위로와 응원이 고맙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마음으로 새해를 시작하게 해준 것이 고마웠다. 그런데 어쩌나. 두고두고 먹기에 감귤 한 상자는 너무 많은데. 한 알이라도 물러 버리는 일을 초래하고 싶지 않을뿐더러, 친환경 노지 귤이라 껍질조차 그냥 버리기 아까운데. 누가 어떤 마음으로 보내준 건데. 그래, 어느 정도 체력이 돌아온 듯싶으니 마멀레이드를 만들어볼까.

레시피는 간단하다. 주재료는 H의 온기. 부재료는 정성 듬뿍. 우선 황금빛 귤을 베이킹소다로 세척한 뒤 소금물에 살짝 데친다. 과육은 블렌더로 갈고, 껍질은 차곡차곡 포개어 채 썰고, 그 둘을 커다란 냄비에 시차를 두고 넣어 끓이다가 유기농설탕을 조금씩 부어가면서 뭉근히 졸이고 또 졸인다. 달콤하고 상큼한 향과 식감이 만족스러울 때까지.

열탕 소독한 유리병에 완성된 마멀레이드를 담고 보니 12병이나 됐다. 그중 몇 개를 선물용으로 포장했다. 뒷정리와 약간의 피로가 남았지만 H와 몇몇 지인에게 나눠 줄 생각만으로도 행복지수가 상승했다. H는 감귤보다 더 귀한 것을 보내주었구나.

정길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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