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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07 (화)

서태지·마마무 무대의상… 이 '할배'들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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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서태지부터 BTS까지 옷 만들어온 청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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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청화사가 제작한 모모랜드 ‘떰즈업’ 뮤직비디오 의상. ② 2019 MBC 가요대제전에 청화사가 제작한 의상을 입고 나온 뉴이스트. / 유튜브


"이미 한바탕 휩쓸고 갔어요. 일주일 동안 50벌도 넘게 만들었을걸요?"

지난 12월 마지막 주에 공중파 3사에서 열린 가요 결산 무대 직후의 청화사. 뉴이스트와 갓세븐 등 아이돌의 무대 의상을 제작한 이 회사의 사무실은 마치 격렬한 전투를 치른 뒤 풀 한 포기 남아나지 않은, 고요한 전장(戰場) 같았다. 청화사의 정종윤(78) 사장은 "뉴이스트는 다섯 명, 갓세븐은 일곱 명, 이들만 해도 12명인데 연말에 방송사와 시상식 다섯 군데 나가면 벌써 60벌이 넘는다. 게다가 백댄서도 있다. 연말에는 재봉틀이 쉴 새 없이 돌아갔는데, 신년이 되니까 겨우 한숨을 돌린다"고 했다.

청화사는 '서태지와 아이들'부터 BTS까지, 30년 가까이 한국 아이돌의 무대 의상을 맡고 있는 제작사다. 아이돌 1세대랄 수 있는 HOT부터 신화, 빅뱅까지 아이돌의 무대 의상은 모두 이들의 손을 거쳤다. 1990년대 초중반에는 이런 의상 제작사가 다섯 손가락 안에 꼽혔는데, 지금은 "몇 개나 있는지 알 수 없다"고 할 정도로 많다.

아이돌을 완성시키는 60, 70대 남자들의 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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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사동에 있는 청화사의 사장과 직원들이 제작한 공연 의상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부터 서한일, 김영진, 김순구, 사장 정종윤, 황순덕씨. / 박상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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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사동 강남시장 인근의 한 건물 2층에 위치한 청화사는 113.19㎡(약 34평) 규모. 생각보다 작은 사무실이었다. 패턴을 그리고 원단을 자르는 탁자와 재봉틀 서너 대와 다리미가 놓여 있는 단출한 곳이다. 현란한 조명에 의상이 반짝이고 환호성이 끊이지 않는 아이돌의 무대와는 가장 거리가 먼 곳이라고 보면 된다. 정 사장이 패턴을 만들고, 서한일(66)·김영진(63)·김순구(61)씨 등이 재봉을 한다. 김순구씨를 제외하고 세 사람은 40년 가까이 알고 지낸 사이.

이곳에 60대 이상의 남자가 많은 이유는 두 가지다. 우선 공연 의상은 대개 원단이 두껍고 무거운 경우가 많아서 힘과 기술이 필요하다. 경험이 많은 남성을 선호하게 된다. 다른 이유는 이 일을 하는 젊은 사람이 없어서다. 이 '바닥'에선 누굴 붙잡고 나이를 물어봐도 환갑이 넘는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서씨는 "만약 배울 사람이 있다고만 하면, 우리가 모시며 가르칠 것"이라며 "기술을 배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젊은 사람들은 당장 돈을 벌 수 있는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더 선호하는 것 같다"고 했다.

계기는 대개 비슷하다. 집안 사정이 어려워 16, 17세부터 옷 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기술을 터득하기 전까지는 월급을 아예 못 받았고, 실수하면 두들겨 맞았다. 정 사장은 "5년 정도 고생하고 나면 어디 취직할 수준은 됐다"며 "그때 서울 동대문의 의류 공장에 들어갔다"고 했다. 1980년대 초반, 그는 서울 명동 성당 근처에 의상 제작실 '청화사(靑花社)'을 냈다. 특별한 의미를 둔 게 아니라 당시 유행을 따라 지은 이름이다. 강남으로 건너온 것은 6년 전쯤이다.

청화사가 처음부터 연예인 의상을 전문적으로 취급한 것은 아니다. 디자이너의 의상실에서 제작을 의뢰하는 옷을 주로 만들었다. "옷을 꽤 만든다" "솜씨가 좋다"는 얘기를 듣기 시작하자 고(故) 하용수 디자이너가 그에게 작업을 맡겼다. 하씨가 연예인들과 친분이 있었기 때문에 청화사도 자연스레 가수들의 공연 의상을 만들게 됐다. 정 사장에 따르면 조용필, 현철, 김학래, 방실이, 나미 등 당대의 가수 중 청화사를 거치지 않은 이가 없었다.

서태지부터 BTS까지 의상 제작…관건은 속도

청화사가 공연 의상을 전문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나오기 시작한 1990년대부터다. '서태지와 아이들'부터 가수의 스타일리스트가 하나의 직업으로 자리 잡았다. 이들은 의상실을 거치지 않고 업계 동료들의 소개를 받아 청화사를 직접 찾았다. 의상 스케치나 잡지 화보, 패션쇼 사진, 심지어는 만화책까지 시안으로 들고 왔다. 스타일리스트들이 원단까지 정해주고 나면 청화사와 같은 제작실에서 옷을 만든다. 이 시스템은 아직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음반의 타이틀곡에 따라 전체적인 콘셉트를 잡고, 의상도 여기에 맞춰서 만들기 시작한 것은 HOT다. 아이돌의 모든 것을 알고자 하는 팬들 덕분에 '빅뱅'이나 '소녀시대'의 스타일리스트는 유명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제아무리 극성맞은 팬이라도 아이돌이 입는 의상이 정 사장과 청화사 직원들의 주름진 손끝에서 나왔다는 것은 모른다. 정 사장은 "나는 시키는 대로 만들 뿐, 옷을 디자인하는 스타일리스트들이 대단하다"고 했다.

"무대마다, 멤버마다 다른 옷을 입혀야 하는데 얼마나 머리가 복잡하겠어요. 제가 옷 만드는 경험이 많다 보니 '이 스타일은 이렇게 만드는 게 입기 편하겠다' '다른 원단을 쓰는 게 낫겠다'고 얘기를 해주죠. 생각했던 것보다 옷이 잘 나오니까 계속 찾아와요."

공연 의상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속도다. 하루 전에 의뢰하는 경우도 있고, 의상을 가져가기 위해 제작실 건물 앞에 퀵서비스 오토바이가 대기하기도 한다. 갓세븐의 스타일리스트인 박상민씨는 "다른 스타일리스트에게 소개받아 1년 반 전부터 청화사를 찾았는데, 이곳의 가장 큰 강점은 책임감이다. 방송 일정 때문에 하루 만에 일곱 명의 의상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해도 거절한 적도, 늦은 적도 없다"고 했다.

최근에는 명품 브랜드 의상과 기성복을 협찬받거나 사서 입는 아이돌 그룹도 꽤 많다. 정 사장은 "아이돌이 초반에는 스타일리스트가 주는 의상을 그대로 입지만, 인기를 얻고 나면 자신이 원하는 스타일을 주장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화사와 같은 제작사에 일감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공중파 음악 방송에서 특정 브랜드의 로고가 보이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 무대마다 다른 의상을 선보여야 하는데 매번 사거나 협찬만 받을 수도 없다. 청화사 측은 "의상 가격을 절대 밝힐 수 없다"고 했다. 아이돌 업계에서는 무대 의상 한 벌 가격은 평균 50만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정 사장은 "모든 무대 의상은 화려하고 특이하니까 딱히 기억에 남을 만한 것은 없다. 그런데도 '서태지와 아이들'이 맡긴 의상 하나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단추 백 몇십개가 달린 옷이었어요. 백개가 넘는 단추를 달고, 거기에 맞춰서 백개가 넘는 단추 구멍도 다 뚫었으니까요. 유행이 돌고 도는지 비슷한 옷이 나중에 한 번 더 의뢰가 들어왔어요. 그 짓을 두 번이나 했으니 잊을 리가 있나요."

청화사의 사장과 직원들은 식당에서 일 이야기를 할 때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느낀다. 예순이 넘은 남자들이 모여서 BTS부터 데뷔한 지 얼마 안 된 아이돌 그룹의 이름을 읊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청화사가 아끼는 아이돌 그룹이 있을까.

"마마무. 초반에 우리가 옷을 꽤 만들었죠. 멋있고, 카리스마 있어서 좋아요."(김영진)

"모모랜드! 원래 노래와 춤을 다 좋아해서 팬이었는데, 최근에 우리한테 옷을 맡겨서 이젠 더 좋아하게 됐어요."(김순구)

"아이돌 그룹은 별로고, 미스 트롯이 좋아요."(서한일)

정 사장이 이 얘기를 듣고 있다가 "청화사는 남자 아이돌 그룹의 옷을 많이 만드는 편인데, 이들의 입에서 나온 건 죄다 여자 아이돌이다. 예순이 넘어도 어쩔 수 없나 보다"라고 했다.

"저는 좀 달라요. 일단 멤버 숫자가 많은 그룹이 좋고요, 잘나가는 그룹도 좋아요. 그래야 방송에도 많이 나오고 저희를 더 많이 찾을 거 아니겠어요? 앨범 재킷이랑 뮤직비디오 찍는다고 옷을 하러 왔다가 그다음에 의뢰가 오지 않는 아이돌들을 보면 괜히 안쓰러워요."

[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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