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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6 (목)

“성에는 쿨하고 성교육엔 둔한 세상… 제가 제대로 알려드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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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주말]

'질 좋은 책' 저자 정수연

조선일보

‘질 좋은 책’을 펴낸 저자 정수연씨는 “책에 사적인 내용이 많아서 얼굴을 알리기 싫다”며 얼굴을 가린 채 사진을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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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PV 고위험군에 걸리셨습니다.”

이 전화 한 통을 받은 후 정수연(20대 후반)씨는 "인생이 180도 달라졌다"고 했다. 2016년 자궁경부암 검진 무료 대상자라는 통보를 받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암 검사와 함께 암을 일으킬 수 있는 HPV(Human Papilloma Virus·인유두종 바이러스) 검사도 함께 받았다. HPV는 주로 성행위를 통해 점막이나 상피에 감염을 일으키는 바이러스 무리이다. 이 바이러스 중에는 자궁경부암의 원인이 되는 '고위험군' 타입이 있다. 여자에게만 위험한 바이러스가 아니다. 최근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는 HPV로 인한 자궁경부암보다 남성도 걸릴 수 있는 구인두암 신규 발병률이 더 높다는 통계를 발표했다. 2012년 네이처지가 HPV를 '전지구적 부담'(global burden)이라고 불렀을 정도로 흔하면서 치명적이다.

"20대 초반, 그 검사를 받기 전까지 저는 평생 HPV라는 걸 들어본 적이 없었어요. 병원에 갈 때 내야 하는 돈도 부담이 됐지만 부모님한테 말씀드릴 수 없어서 혼자서 끙끙 앓았어요. 암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HPV에 대해 미친 듯이 독학했죠."

지난달 나온 성 교육서 '질 좋은 책'은 정씨가 HPV 판정을 받고 난 뒤 그가 알게 된 것과 경험한 것을 집약한 산물이다. HPV에 걸리고 나서야 "왜 이런 게 있다는 걸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을까"라는 의문과 분노를 갖게 된 그는 사람들과 HPV와 성 건강에 대해 정보를 주고받기 위해 블로그를 만들었다. 사단법인 푸른아우성에서 성교육, 성상담 전문가 자격도 땄다. 현재 온라인에서 성상담을 하면서 초·중·고등학교에서 성교육 강의를 한다.

정씨는 "연애를 하면 당연히 섹스도 한다고 생각하는 쿨한 세상이다. 섹스에는 어떤 결과가 따른다는 것을 알려주지도 않는 무책임한 세상이기도 하다"고 했다. 10대 성교육 현장까지 경험하고 나니 책을 쓰자는 결심이 더 굳어졌다. 연간 의무교육이 15시간이지만 이를 준수하지 않거나 강의를 방송으로 내보내는 경우가 많아서 학생들이 궁금해하는 것에 답변해줄 수가 없었다. 강의 내용이 "정자와 난자가 만나면"으로 시작하는, 생물 수업 수준에 그치는 경우도 봤다. 학교 강의 중 만난 학생들의 질문이나 고민은 "성매매해도 되나요?" "남자 친구가 섹스하자는데 무서워요" "자위는 어떻게 하나요" 같은 것들이었다. 책의 부제가 '학교에서 가르쳐주지 않는 진짜 성교육'이다.

"최근의 10대 성교육은 성인지 감수성이나 인권 교육에도 중점을 두고 있어요. 그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몸에 대한 교육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거든요. 성을 돈 주고 사는 건 도덕적으로 나쁘다고 뻔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 성매매로 인한 성병의 위험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려주는 게 훨씬 효과적이에요."

책이 출간되자마자 SNS에서는 이미 화제가 됐다. 자위하는 방법을 그림까지 동원해 알려주거나 HPV에 대해 30페이지를 할애한 성교육서는 그동안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HPV 감염을 알게 된 순간부터 바이러스 '불검출'이 나오게 된 과정을 세세하게 적어놓은 것이 큰 공감을 얻었다. 정씨는 "그 내용을 쓰기까지 굉장히 고민을 많이 했다. 친구들이 이 책을 읽고 (나한테) 정떨어지면 어쩌나, 가족이 알면 놀랄 텐데 등등. 그런데 친구들의 반응은 '너도 그랬어? 나도 그랬어'였다"고 했다.

"제 경험을 갖고 이야기하지 않으면 다른 성교육 책과 다를 게 없어요. 의학 지식은 산부인과에서도 알려주니까요. 상담할 때 제일 많이 듣는 얘기가 뭔지 아세요? '제가 이런저런 문제가 있는데, 저만 이런 거 아니죠?'라고 물어보는 거예요. '당신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그래'라고 말해주는 게 어떤 위로 백 마디보다도 힘을 주거든요."

정씨는 어머니에게 "성교육 책을 쓰고 있다"고 알렸지만 거기에 본인의 경험까지 담길 것이라고 하지 않았다. 책이 출간됐다는 소식을 알린 뒤 3일 만에 어머니의 연락을 받았다. 첫마디가 "지금은 괜찮니? 건강하지?"였다. "에필로그에 엄마를 언급했는데, 그걸 읽고 많이 우셨나 봐요. 엄마는 제가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책임감이 있고, 어른이 된 것 같다고 하시던데요."

정씨는 아버지에게는 아직도 이 책에 대해 말하지 못했다.

[변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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