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05.13 (월)

예로 나라를 구한 강호의 화신, 위공자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표변하는 삶] 위공자

인공지능을 장착한 로봇이 인간을 따라잡는 속도보다 오히려 인간이 기계를 닮아가는 속도가 빠른 것 아닌가 갸우뚱해지는 시대다. 문득 중국 전국시대에 살았던 위공자의 삶을 돌아보고 싶어진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이념이 당연한 시대에 살고 있건만, 과학기술이 발전하면서 불평등한 현실이 완화되기는커녕 점점 심해져 가고, 인간이 기계처럼 변한다는 착각이 들기도 한다. 반면에 불평등이 '디폴트'처럼 주어진 시대에도 위공자 같이 일국의 공자(公子: 제후의 자식)로 태어났지만 현인이건 불초한 자건 가리지 않고 모두 예로 대접했으며, 자신이 부귀하다고 교만 떨지 않았던 인물이 있었다. 그래서 위공자의 열전을 읽으면 마음이 호방해지면서도, 다른 한편 그의 고독하고 불우했던 말년이 생각나 마치 내 일인양 씁쓸해진다.

전국 사공자의 으뜸위공자는 누구인가? 삼천 명에 달하는 식객 중에 닭 울음소리 낼 줄 아는 사람, 개 도둑 등 별의별 사람이 많았다는 맹상군은 알아도 위공자는 모르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위공자의 이름은 위무기(魏無忌). '꺼리는 것이 없다(無忌)'는 이름에 벌써 패기가 넘친다. 그는 위나라 소왕의 막내아들이며, 안희왕의 배다른 동생이다. 봉호는 신릉군.

위공자는 천성이 어질었다. 사람을 가리지 않고 예로 대하니 사방에서 선비들이 그의 곁으로 모여든 것은 당연한 일. 빈객이 3000명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제후들은 현명한데다가 빈객도 많이 거느린 신릉군을 겁내 10여 년 동안이나 감히 위나라를 침범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한다. 위공자의 영향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위공자는 조나라의 평원군 조승, 초나라의 춘신군 황헐, 제나라의 맹상군 전문과 함께 전국시대의 사공자(四公子)로 불린다. 그 중 당시 제후들 사이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던 이가 위공자였다. 사마천이 열전을 쓰면서 다른 이들은 봉호를 내걸었지만 위무기만은 명실상부한 공자였기 때문에 <신릉군열전>이라고 하지 않고, <위공자열전>이라고 하였다. 그의 열전에 공자라고 칭한 곳이 무려 147번이나 나온다.어느 시대나 국가가 부강하기 위해서는 인재가 제일 중요하다. 좋은 인재를 선발하려면 먼저 풍부한 인재가 축적되어 있어야 한다. 아무리 훌륭한 방법으로 인재를 선발한다고 해도 인재의 풀 자체가 빈약하면 빼어난 인재를 등용하기 어렵다. 전국시대에 천하 통일의 기운이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각 나라가 부국강병을 위해서 널리 식객을 받아들여 인재를 기르는 양사(養士)의 풍조가 유행했다.

"천하의 여러 공자들 역시 선비를 좋아했다." 맹상군도 식객을 가리는 바가 없이 잘 대해주기는 했지만 "식객을 좋아하여 스스로 기뻐했을" 뿐이었다. 평원군은 많은 식객을 기를 뿐 모수 같은 인재가 스스로 자신을 추천할 때까지 알아보지 못했다. 춘신군은 주영의 올바른 충고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 때문에 이원을 끊어내지 못해 오히려 자신이 죽었을 뿐만이 아니라, 일가가 몰살당했다.

은자에는 상중하의 등급이 있는데 하등의 은자가 산 속에 숨고, 중등의 은자는 저자거리에 숨으며, 상등의 은자는 조정에 숨는다는 말이 있다. 신릉군만이 숨어사는 은자인 대량(현재 허난성 카이펑)의 동문 문지기 후영을 찾아가 만났고, 주해(저자거리의 백정)와 같은 미천한 이들과 사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명망을 얻기 위해 겉으로만 그런 제스처를 취한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그들을 믿었으며 또한 그들의 진지한 조언을 받아들였다. "신릉군은 태사공 흉중의 득의의 인물이고, 그의 열전 또한 태사공의 득의의 문장"(명나라 모곤)이라는 평이 나온 데엔 다 이유가 있다.

후영과 절부구조

위공자가 일생을 두고 한 일은 군사적으로 당시 최강국인 진나라의 군대를 두 번 꺾은 것이다. 이는 거의 "춘추오패의 공적에 비견"되는 일이었다. 한번은 진나라의 침략을 받은 이웃나라 조나라를 구했고, 다른 한번은 망명지인 조나라에서 고국으로 돌아가 진나라를 격파한 일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평소에 사귀었던 후영, 주해, 모공, 설공 덕분이다.

첫 번째 일이다. 위나라 안희왕 20년, 진나라 소왕은 장평에서 조나라 군대를 대파하고 나서 조나라의 도성인 한단을 포위했다. 조나라의 평원군(부인은 신릉군의 누나다)은 위나라 왕과 신릉군에게 여러 차례 구원을 청했다. 하지만 당시 위나라는 마릉의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 이미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남을 도울 형편이 아니었다. 더욱이 최강국 진나라는 조나라를 돕는 나라가 있다면 조나라를 함락하고 나서 공격하겠다고 협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강 건너 불구경하듯이 가만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훗날 전국시대 여섯 나라가 진나라에 의해 멸망당한 순서(한나라, 조나라, 위나라, 초나라, 연나라, 제나라)를 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조나라와 위나라는 순망치한의 관계에 있었다. 조나라가 함락될 위험에 빠지도록 방치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멸망을 재촉하는 것이기도 했다.

위나라 왕은 일단 진비 휘하 10만 대군의 구원병을 보내기는 했지만 사자(使者)를 시켜 싸움을 벌이지 말고 진을 치고 사태를 관망하게 했다. 속이 타들어간 신릉군은 나름 여러 가지 루트로 빈객을 동원해서 왕을 설득하고자 했으나 위나라 왕은 그의 청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신릉군은 왕의 총애를 받는 여희를 통해 병부를 훔쳐내고, 같이 간 주해를 동원해서 죄 없는 장수 진비를 철퇴로 죽이는 비상한 방법으로 병권을 차치한다. 이는 모두 후영의 아이디어였다.

이렇게 해서 차지한 10만의 군사 중에서 신릉군은 부자가 같이 온 병사는 아버지를, 형제의 경우는 형을, 부모를 봉양해야 할 외아들은 모두 돌려보내고 남은 군사 8만을 이끌고 공격해서 진나라를 퇴각하게 만들었다. 유명한 절부구조(窃符救趙)의 고사는 바로 이 일을 말한 것이다.모공과 설공의 충고와 귀향

두 번째 일이다. 강대국에 맞서 이웃나라를 구하는 의로운 일을 했지만 왕 몰래 병부를 훔치고, 죄 없는 장수를 죽이는 큰 죄를 범했기 때문에 그는 위나라로 돌아갈 수 없었다. 군대를 돌려보내고 몇몇 빈객들과 조나라에 남았다. 모국에서 곤란한 처지에 빠진 것을 알고 조나라 왕은 그에게 다섯 개의 성을 봉읍으로 하사하려고 했다. 다시 말하면 다섯 개의 도시를 주려고 한 것이다. 신릉군에게 교만한 마음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도 있지만 다섯 개의 도시의 주인이 될 수도 있으니 교만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그는 조나라에서는 영웅이었다. 주위의 빈객은 즉각 충고한다.

"무릇 일에는 잊어서는 안 될 것이 있으며, 혹은 잊지 않으면 안 될 것이 있습니다. 대저 다른 사람이 공자에게 베푼 덕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고, 공자께서 남에게 베푼 은혜는 잊으셔야 합니다."

위공자는 바로 자신의 잘못을 고친다. 조나라 왕은 밤새 그와 함께 밤새 통음을 하면서도 다섯 개의 성을 바칠 수도 없었다. 너무나도 극진히 사양했기 때문이다. 위공자는 결국 조나라에 남아서 10년 동안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 사이 그는 모공과 설공을 사귀었다. 모공은 노름꾼이었고, 설공은 술파는 사람이었다.

신릉군이 조나라에 머무는 동안 진나라는 위나라를 자주 공격했다. 군사적 재능이 있을 뿐만이 아니라 제후 사이에 명성이 자자한 신릉군이 위나라에 없기 때문이다. 위기에 빠진 위나라에서는 사신을 보내 귀국을 요청하지만 왕의 분노가 여전할 것이라고 생각한 신릉군은 돌아가지 않는다. 돌아가지 않을 뿐만이 아니라 위나라의 사신과 내통한 자는 죽이겠다고 자기 휘하의 빈객들에게 위협했다. 그러니 감히 귀국을 언급할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모공과 설공이 찾아와 위험을 무릅쓰고 귀국할 것을 충언한다. 조나라에서 존중받고 제후 사이에서 명성이 생긴 것은 모두 위나라가 있기 때문이라고. 만약 돌아가지 않아서 위나라가 멸망의 지경에 빠진다면 무슨 면목으로 살아갈 수 있겠냐고. 신릉군은 즉시 충고를 받아들이고 귀국한다. 위나라 왕은 그를 상장군에 봉했다. 그는 바로 제후들에게 자신이 위나라의 장군이 되었음을 통지한다. 다섯 나라의 제후들이 군대를 보내 위나라 구원에 나섰고 그는 그들을 지휘해서 진나라를 격퇴시켰다.쓸쓸한 최후

진나라의 군대를 두 번이나 격퇴해 제후 사이에 명성이 자자한 위공자도 말년에 술과 여자를 가까이 하다가 술병으로 병사했다. 원래 주색을 좋아했기 때문이 아니라, 진나라의 이간책에 놀아난 왕이 그를 의심해서 장수의 지위를 뺏어버렸기 때문이다. 인후한 품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숨어 있는 현자를 알아보고 사귀었으며 적시에 그들의 충고를 수용할 줄 알았던 총명하고 호방한 위공자도 결국 왕의 의심 때문에 무너진 것이다.

사마천은 대량의 옛 터를 지날 때마다 동문(夷門이 동쪽 문이다)에 가보았다. 신릉군이 후영을 찾아갔던 그 동문 말이다. 열전을 읽으면 신릉군이 연회를 열어놓고, 손님들을 기다리게 한 후 동문에 있는 후영을 찾아가서 마차의 상석에 앉히고 돌아오는 과정이 정말 감동적인 영화를 보는 것처럼 눈에 선하다. 천자의 지위에 오른 한고조 유방도 대량을 지날 때면 백성들을 시켜 신릉군에게 제사 지내게 했다니 그들이 신릉군을 얼마나 사모했는지 알 수 있다.

왕유(王維)의 이문가(夷門歌)를 비롯해서 당시(唐詩)에 이 고사를 노래한 시들이 많은 것을 보면 이 이야기가 시인의 감성을 얼마나 자극했는지도 알 수 있다. 인터넷이나 소셜미디어는 없었건만, 숨어 있는 은자들의 명성이 '쩌렁쩌렁'해서 귀인들도 끼리끼리 놀지 않고 자신을 낮춰 그들을 찾아가 만나곤 했던 '강호'가 존재한 그 시절이 왠지 그리워진다.

기자 : 황희경 성균관대 초빙교수

- Copyrights ©PRESSian.com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