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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8 (일)

미 항모에 ‘진주만 흑인영웅’ 이름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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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일 마틴 루서 킹의 날 맞아

일 해군기에 응사한 수병 밀러

취역 앞둔 항모에 ‘도리스 밀러’호…첫 사례 파격

니미츠 “돋보이는 헌신, 예외적 용기” 십자훈장

1943년 태평양 해전에서 승선 항모 침몰해 전사

기념관 “해군 사고방식 바꿔 민권운동에 기여”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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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항공모함이 처음으로 흑인 병사의 이름을 따 명명된다.

1960년대 미국 흑인 민권운동 지도자를 기념하는 ‘마틴 루서 킹의 날’(매년 1월 셋째 월요일, 올해는 20일)을 맞아, 미국 해군이 새로 취역할 항공모함 ‘시브이엔(CVN)-81’의 명칭에 태평양전쟁 때 활약한 흑인 수병 도리스 밀러(1919~1943)의 이름을 붙이기로 했다고 <호놀룰루 스타 애드버타이저>가 지난 17일 보도했다. 통상 대통령이나 제독급 장성의 이름으로 명명하는 미국 항공모함에 일개 병사, 그것도 전투 병과가 아닌 흑인 취사병의 이름을 명명하는 것은 전례가 없는 파격이다. 포드급 항모인 시브이엔-81은 조달 가격이 125억달러(약 14조 5000억원)에 이르며, 2032년 해군에 인도될 예정이라고 신문은 전했다.

도리스 상병의 고향인 텍사스주 와코 소재 도리스 밀러 기념관의 도린 레이븐스크로프트 팀장은 “밀러는 자신에게 주아진 임무의 한계를 넘어선 젊은이를 표상한다는 점에서 미국의 영웅”이라고 말했다. 밀러의 ‘영웅담’은 태평양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은 미국 해군 태평양 함대에 대재앙이었다. 하늘을 뒤덮은 일본 해군기들이 진주만에 정박해있던 미국 전함들을 맹폭할 당시, 22살 밀러는 전함 웨스트버지니아호의 취사 보조병이었다. 배가 어뢰에 맞아 침수되고 함정 지휘관들까지 심각한 부상을 당한 절박한 상황에서 밀러는 기관총을 붙들고 응사했다. 기관총 사격 훈련을 받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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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러의 필사적인 대응에도 전함은 결국 침몰하고 승선원들은 배를 버려야 했지만, 그의 용기는 군인으로서의 귀감으로 인정받았다. 이듬해 5월, 미국 태평양함대 사령관 니미츠 제독은 밀러에게 미국 해군에서 두 번째로 높은 해군십자훈장을 수여했다. 훈장에는 “돋보이는 헌신, 예외적 용기,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음으로, 맹렬한 교전에 직면해 중상을 입은 지휘관을 구출하고 하선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일본군의 공격에 기관총으로 맞섰다”는 무공이 찬사로 새겨졌다. 인종차별이 노골적이었던 당시로선 이것도 파격이었다.

약 2년 뒤인 1943년 11월, 밀러는 태평양의 마킨 환초 전투에서 자신이 승선한 항공모함이 일본 잠수함의 어뢰에 맞아 침몰하면서 실종돼 전사했다. 그러나 그의 병과는 마지막까지도 인종주의의 벽에 가로막혀 ‘취사병’에 머물렀다. 레이븐스크로프트 팀장은 “당시만 해도 미국 해군은 흑인에게 기관총 사수 자리를 허용하지 않았으며, 밀러는 사실상 취사병 이상의 임무를 할 수 없었다”며 “그러나 그의 행위가 이후 그런 흐름을 바꿔놓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밀러는 자신의 행동이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 생각하지 못한 채, 전쟁 시기에 자신의 방식으로 미국을 수호하기 위해 필요한 행동을 했다”며 “자신은 인식하지 못했지만, (자신의 행동으로) 사실상 해군의 사고방식을 바꿨다는 점에서 그는 민권운동의 일부가 됐다”고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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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미국 의회 보고서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당시 미국 전쟁부는 백인과 흑인 병사들의 징집영장을 구별해 발부했으며, 군사훈련과 병과 할당에도 차별을 뒀다. 이 보고서는 “1950년 한국전쟁에 미국이 주도적으로 개입하면서 병력 수요가 급증하고 시간은 촉박한 사정이 (군대에서) 인종 통합의 촉매가 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1960~70년대에 이르러선 미국 해군에서 흑인들도 전투함과 잠수함의 지휘관이 되거나 군항 시설의 관리자가 되기 시작했다.

지난해 12월 현재, 미국 해군은 구축함과 탄도미사일 발사 잠수함을 포함해 모두 14척의 군함에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이름을 명명해 운용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 전년도의 미국 해군 복무자는 백인 69.1%, 흑인 16.8%, 히스패닉 15.8%, 아시안 4.4%, 하와이와태평양의 여러 섬 원주민 1.1%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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