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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7 (금)

껌으로 시작해 재계 5위 성공 신화 쓴 `신격호` 인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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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경제

[사진제공 : 롯데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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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히트상품은 껌이었다. 자본금 100만엔, 당시 종업원 수는 10명에 불과한 회사였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 나오는 여주인공 '샤롯데' 이름을 따 회사명을 지었다. '롯데'란 회사였다.

2차 세계대전 직후 잿더미 위에서 껌을 팔기 시작한 지 70년 만에 한국 재계 5위, 매출 83조의 롯데그룹을 일궜다. 명실상부 '현대 한국 최고 경영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신격호 롯데 명예회장이 19일 99세를 일기로 영면했다.

신 명예회장의 별세로 이병철 삼성 회장, 정주영 현대 회장, 구인회 LG 회장, 최종현 SK 회장 등 '창업 1세대 경영인' 시대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됐다.

◆자수성가형 기업가...日서 빌린 5만엔으로 비누·껌 팔아 사업 일으켜

한국과 일본 양국에 걸쳐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 대기업을 일궈낸 자수성가형 기업가인 신 명예회장은 1922년 경남 울산 삼남면 둔기리에서 농부의 5남5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1942년 일본 와세대대학에서 공부하기 위해 유학을 떠난 그의 수중에는 사촌형이 마련해 준 노잣돈 83엔이 전부였다. 낮에는 우유와 신문을 배달하고 밤에는 대학에 다니며 학업에 정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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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명예회장은 특유의 친절과 신용으로 주문이 밀려들자 자신도 배달원이면서 배달원을 고용할 만큼 일찌감치 탁월한 경영능력을 드러냈다. 그의 성실함과 경영 능력을 눈여겨 본 일본인 사업가 하나미쓰는 그에게 사업 자금으로 5만엔을 빌려줬다. 1944년 신격호는 도쿄 인근에 윤활유 공장을 세운다. 하지만 당시 미군의 폭격을 받고 가동도 못하고 불타버렸다. 5만엔은 고스란히 빚으로 남았다.

1946년 3월 와세다고등공업 이공학부를 졸업한 신격호는 다시 도쿄 시내에 직접 붓으로 쓴 '히까리(光) 특수화학연구소' 간판을 내걸고, 비누·포마드·크림 같은 유지 제품을 만들었다. 패전 후 극심한 생필품난에 허덕이던 일본에서 그가 만든 수제 비누는 생산하기 무섭게 동이 났다. 사업을 시작한 지 1년도 되지 않아 5만엔의 빚을 모두 갚을 만큼 돈을 벌었다.

1947년 4월 마침내 신 명예회장은 롯데의 상징이자 뿌리인 껌을 다음 사업 아이템으로 주목했다. 점령군 미군 군수품을 흉내 낸 조악한 품질의 초산비닐 수지 껌이 넘쳐날 때, 그는 남미산 천연수지로 당시 최고 수준의 껌을 만들어 큰 인기를 끌었다.

이같은 성공을 발판삼아 1948년 6월 마침내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주식회사 '롯데'가 설립됐다. 한 때 작가의 꿈을 키우기도 했던 신 명예 회장은 롯데가 샤롯데처럼 사랑받는 기업이 되길 바라는 마음에서 회사 이름을 '롯데'라 지었다. 샤롯데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나오는 여주인공 이름이다. 여주인공처럼 모든 제품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였을까. 롯데는 당시 일본 껌 시장의 70%를 장악했고, 초콜릿(1963년)·캔디(1969년)·아이스크림(1972년)·비스킷(1976년) 등을 잇달아 내놓고 종합 제과기업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껌 회사로 탄생한 지 40년도 채 되지 않아 1980년대 중반 이미 롯데는 일본에서 롯데상사, 롯데부동산, 롯데전자공업, 프로야구단 롯데오리온즈(현 롯데마린스), 롯데리아 등을 거느린 재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한국 제과·호텔·백화점에 선구적 투자…월드타워 완공으로 '숙원' 이뤄

고국인 한국에서는 1959년부터 롯데와 롯데화학공업사를 세워 껌· 캔디·비스킷·빵 등을 생산했다. 당시 신 명예회장은 한국의 동생들에게 경영을 전적으로 맡기고 직접 관여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1965년 12월 18일 한일국교 정상화, 1966년 6월 17일 재일동포 법적지위 협정 체결. 발효 등으로 고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신 명예회장은 본격적으로 한국 경영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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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호텔 설립 추진 회의를 진행 중인 신격호 명예회장(연도미상) [사진제공 : 롯데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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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명예회장은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선 제과업을 시작으로 고국 투자에 나섰다. 1967년 4월 자본금 3천만원으로 롯데제과주식회사를 세우고 당시 국내 처음으로 멕시코 천연 치클을 사용한 고품질 껌을 선보여 한국에서도 '껌 왕국'으로서 명성을 쌓았다.

왔다껌, 쥬시후레쉬, 스피아민트, 후레쉬민트 등이 '대박' 행진을 거듭했고, 1972년 이후 빠다쿠키, 코코넛바, 하이호크랙커 등 다양한 비스킷 제품도 쏟아냈다. 롯데제과는 1973년 당시 제과업체로는 드물게 기업 공개를 결정했고, 창립 8년만인 1974년 연간 매출이 100억원을 넘어섰다.

신 명예회장은 식품 외에 관광과 유통을 고국에 필요한 '기반사업'으로 주목하고 과감한 투자에 나섰다.

1973년 지하 3층, 지상 38층, 1000여 객실 규모의 당시 국내 최고층 건물, 동양 최대 특급호텔로 문을 연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이 그러한 투자의 첫 결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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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월드타워 전경 [사진제공 : 롯데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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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개장한 소공동 롯데백화점 역시 그가 유통분야에 보인 선구자적 모습이었다. 당시 소공동 롯데백화점의 규모(지하 1층~지상 7층)는 기존 백화점의 2~3배에 이르렀고, 영세 백화점이 난립한 당시 유통업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선진국 백화점에 견줄 만큼 질 측면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비슷한 시기 신 명예회장은 평화건업사 인수(1978년·현 롯데건설), 호남석유화학 인수(1979년·현 롯데케미칼) 등을 통해 건설과 석유화학 산업에도 진출했다.

식품-관광-유통-건설-화학 등에 걸쳐 진용을 갖춘 롯데그룹은 1980년대 고속 성장기를 맞았고, 기네스북인 인정한 '세계 최대 실내 테마파크' 서울 잠실 롯데월드도 1989년 문을 열었다. 신 명예회장은 1990년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집계한 세계 부자 순위에서 9위에 오르기도 했다.

1990년대에도 신 명예회장은 편의점(코리아세븐), 정보기술(롯데정보통신), 할인점(롯데마트), 영화(롯데시네마), 온라인쇼핑(롯데닷컴), SSM(롯데슈퍼), 카드(동양카드 인수), 홈쇼핑(우리 홈쇼핑 인수) 등으로 계속 사업 영역을 넓히며 롯데를 재계 서열 5위로 끌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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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 전경 [사진제공: 롯데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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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명예회장이 그룹 안팎의 반대를 무릅쓰고 2010년 11월 착공한 국내 최고(123층·555m), 세계 5~6위권 고층 건물 서울 송파구 롯데월드타워는 2017년 4월 공식 개장했다.

신 명예회장은 지난해 1월 16일 집무실 겸 거처를 소공동 롯데호텔 신관 34층에서 롯데월드타워 49층으로 옮기면서 평생의 숙원 사업을 완성했다.

하지만 1년 5개월 만에 거처를 다시 소공동 롯데호텔로 옮긴 그는 결국 30년 가까이 집무실 겸 거처로 사용하던 이곳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디지털뉴스국 방영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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