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신도시 대로변. 24시간 집회를 신청한 한 단체는 노점을 펼쳐놓고 영업을 하고 있었다. 신도시 개발을 앞두고 영업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자 이른바 '생존권 투쟁'이란 이름을 내걸고 집회 명목으로 꼬치·어묵 등 포장마차 음식을 팔기 시작한 것이다.
경찰 관계자는 "이런 단체는 전국 단위 단체를 뒤에 두고 있어 행정대집행을 하려고 하면 상위 단체가 지원을 나와 막는다"며 "집회 신고를 24시간으로 해놓으니 오히려 정상적인 집회는 못하고 집회 명목으로 영업만 하는 셈"이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강원도 소재 아파트단지 앞에서는 불륜을 저지른 남편과 불륜녀의 행각을 폭로한다는 1인 시위가 열렸다. 1인 시위를 연 A씨는 아파트단지 앞에서 '이 아파트엔 남편과 불륜을 저지를 파렴치한 상간녀가 살고 있다'고 적힌 피켓을 들고 시위를 벌였다. A씨는 "가정과 어린아이들이 있는 유부남에게 여성이 의도적으로 접근했다"며 "파렴치한 행동에 사과를 받기 위해 이 자리에 섰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이 '집회 만능주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은 매일 전국 곳곳에서 열리는 집회·시위만 봐도 입증된다. 보수·진보 단체가 주도하는 이념·정치적 성향을 띤 집회만 열리는 게 아니다. 개인 또는 소규모 단체가 자신들 민원을 해결하기 위한 도구로 집회·시위를 하는 사례가 급증하면서 대한민국이 집회공화국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민원성 집회와 관련한 단골 주제는 아파트다. 국민 2명 중 1명이 아파트에 사는 나라답게 아파트 관련 집회·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해 3월 정부가 재건축 안전진단 기준을 대폭 강화하자 서울 양천구와 마포구 일대 노후 아파트 주민들은 거리로 나와 "강남 재건축이 마무리되자 재건축 안전기준을 강화하느냐"며 "비강남권에 대한 차별 정책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서울에 위치한 아파트 입주 예정자들도 최근 건설사를 압박하기 위한 수단으로 구청 앞에 모여 집회를 열었다. 부동산 업계 관계자는 "새 아파트 입주를 앞두고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일"이라며 "건설사들도 집회를 열어야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추진하는 수소, 태양광, 풍력 등 신재생에너지 확산 사업도 대규모 반대 집회로 난항을 겪고 있다. 서울 강서구 개화동 주민들은 지난해 7월부터 수차례 시위를 벌였다. 비상대책위원회까지 만든 주민들이 머리에 띠를 두른 채 피켓을 들고 구청 앞에 모인 이유는 수소생산기지 건설 백지화를 주장하기 위해서다. 시위에 참가한 주민들은 "개화역 수소탱크가 폭발하면 개화동 주민은 다 죽는다"며 수소생산기지 건설을 반대했다.
지난해 10월 인천 동구 주민 500여 명도 동인천역 북광장에 모여 수소연료전지 발전소 백지화 총궐기 대회를 열었다. 지난해 9월 경남 남해에서는 욕지도 인근에 들어설 해상 풍력발전소 건설 백지화를 요구하는 주민 1000여 명이 모여 생존권 사수 결의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해상에 풍력발전단지가 조성되면 소음과 전파로 황금어장이 파괴된다고 주장했다.
여의도 국회 앞에서는 다양한 주제로 집회·시위가 연중 열린다. 마이크와 스피커를 갖추고 일장 연설을 하는 시위, 이곳을 지나가는 국회 관계자에게 하소연하듯 민원을 읊조리는 시위 등 방식은 다양하다. 한 보좌관은 "부당한 일을 당한 사람에 대해선 의원실에서 문제 해결 방안을 찾아볼 수 있겠지만 국회 앞 시위 중 상당수는 개인이나 특정 단체 이익을 관철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위가 일상화하며 시위 도구를 만드는 방법이나 시위 문구 작성 방법을 공유하는 영상 콘텐츠도 화제다. 유튜브에서는 여성가족부 앞에서 1인 시위를 한 시민이 후기를 올려 수천 명이 이를 시청했다. 영상은 피켓을 만드는 도구를 어떻게 구매하는지, 피켓 문구를 어떻게 작성하는지 등을 알려준다.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유튜버들이 집회·시위를 부추긴다는 지적도 있다.
김윤태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대중이 순식간에 동원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면서 집회가 늘어난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이런 현상이 가속화하면 포퓰리즘이 증폭될 우려가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사회문제에 대해 시민들이 적극 참여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확대된 결과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이지만 이로 인해 발생하는 부작용은 경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촛불 시위를 기반으로 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며 집회도 자연스럽게 증가하는 모습"이라며 "목적의 정당성을 명백히 훼손하는 시위에 대한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유신 기자 / 김금이 기자]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